규슈 평정 (1/2)히데요시가 시마즈를 내려 규슈를 지배하

규슈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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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카테고리
사건부
사건명
규슈평정(1586년~1587년)
위치
가고시마현・미야자키현・후쿠오카현・오이타현・나가사키현
관련 성
가고시마성

가고시마성

고쿠부 성

고쿠부 성

기비성

기비성

고쿠라성

고쿠라성

사토하라성

사토하라성

기쓰키 성

기쓰키 성

오카성

오카성

관련 인물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대의 라이벌·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계기로 신종시켜, 텐쇼 13년(1585년)에 나가소카베 모친을 내려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이 규슈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텐쇼 14년(1586년) 7월부터 다음 텐쇼 15년(1587년) 4월까지 도요토미 연합군과 시마즈가가 싸우는 ‘규슈 평정(규슈 정벌, 시마즈 정벌 모두)’이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그런 규슈 평정에 대해 알기 쉽게 해설해 갑니다.

규슈평정이 일어난 이유는?

전국 시대, 규슈는 각 무장이 영토를 둘러싸고 계속 싸우는 격전지였지만, 전국 시대 후기에는 분고(현 오이타현 중남부)의 오토모씨, 히젠(사가현)의 류조지씨, 사쓰마(가고시마현)의 시마즈씨의 3강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마즈씨가 차례차례로 무장들을 내려 영토를 확대. 텐쇼 12년(1584년) 3월에는 시마바라 반도에서 일어난 「오키타 축의 전투」에서 류조지씨의 요한 인물·류조지 타카노부를 토벌하고 있어, 이것에 의해 류조지씨는 쇠퇴. 텐쇼 13년(1585년) 시점에서는, 시마즈 요시히사가 이끄는 시마즈씨는 나카큐슈·미나미큐슈를 거의 수중에 거두고 있었습니다. 시마즈 씨는 「남기는 오토모 씨」라고 말할 뿐, 규슈 통일을 목표로 북상. 오오토모씨가 지배하고 있던 축후(후쿠오카현 남부)를 지배하에 거두고, 통일 거의 눈앞까지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곤란한 것이 오토모 씨의 당주 오오토모 소네. 더 이상 단독으로 시마즈 씨의 기세를 멈출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의지하기로 결의합니다. 소네는 오사카성의 히데요시 아래를 방문하여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가는 것과 교환에 지원을 기원했습니다.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텐쇼 13년(1585년) 10월,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정전을 명합니다. 같은 해 7월에 관백에 취임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조정의 권위를 이용해 규슈에서의 전을 멈추려고 한 것입니다.

오토모 소네는 물론 순종하지만 전쟁에서 우위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사는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히데요시에게 「오토모 씨가 공격해 왔기 때문에 다시 공격했을 때까지」라고 변명해, 텐쇼 14년(1586년) 1월에는 「일병졸로부터의 성취자인 히데요시에게, 겐요리 아침부터 이어지는 역사와 전통의 시마즈 가 따르는 의리는 없다”고 명령을 거부. 이에 대해 히데요시는 시마즈씨에게 오토모씨로부터 빼앗은 영지를 돌려주는 취지를 적은 국분안을 제시합니다만, 이쪽도 시마즈측은 거부. 오토모 씨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고 규슈 통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텐쇼 14년(1586년) 6월에는 시마즈 요시히사 스스로 치쿠마에(후쿠오카현)에 침공해, 오토모씨측의 성을 차례차례로 공격해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정전 명령에 뒤를 뒀다」라는 명목 아래 시마즈씨의 토벌을 결정. 모리 테루 모토와 요시카와 모토하루, 코바야카와 타카 게 등 모리 세와 토사 쿠니 (코치 현)의 나가 소가베 모토 부모, 노부모 부모와 아사키 쿠니 (카가와 현)의 센고쿠 히데히사를 비롯한 시코쿠 세를 규슈에 파견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8월에는 선도 역의 모리키모토 등 모리세가, 9월에는 시코쿠세가 규슈에 도착했습니다.

규슈 평정 ①풍전·분고의 싸움

텐쇼 14년(1586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명을 받은 모리세의 선견대는 시마즈카타의 고쿠라성(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의 공략에 나선다. 그런데 시마즈 쪽의 복병이나 아키즈키 종실의 공격에 의해 단념. 이것이 도요토미군과 시마즈군의 첫 싸움이었습니다.

그 후, 나가소가부 전 부모님 등 시코쿠세와 합류한 모리세는 토요젠국(후쿠오카현 동부에서 오이타현 북부)의 하나오성 등 몇개의 성을 떨어뜨립니다. 10월에는 모리 테루모토가 쿠로다 간베에, 코바야카와 타카케이, 요시카와 모토하루와 함께 큐슈에 도착. 고쿠라성을 공격해 떨어뜨린 것 외, 마가다케성(후쿠오카현 유키하시시) 등을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도요마에에서 활약하는 도요토미군을 본 시마즈 요시히사는, 분고의 오토모 소린을 직접 두드리려고 생각합니다. 10월 하순에는 동생의 시마즈 요시히로가 3만의 대군과 함께 히고로(구마모토현) 경유로, 마찬가지로 동생의 시마즈 가구율이 1만의 병과 히나타로(미야자키현) 경유로 분고에 공격 올라갑니다 . 오카성(오이타현 다케다시) 등 일부 저항은 있었습니다만, 시마즈군은 오토모 쪽의 성을 순조롭게 떨어뜨려 갔습니다. 이렇게 도요젠은 도요토미군이 억류했지만, 분고는 시마즈군의 세력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2월 12일, 분고에서 도요토미군과 시마즈군이 부딪히는 「도지가와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규슈 평정의 서전으로 여겨지는 이 전투에서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오토모 쪽의 쓰루가성(오이타현 오이타시)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나가소가베 전친·신친과 센고쿠 히데히사 시코쿠세는 성을 구원하기 위해 근처의 토지강에 착진. 전 부모는 원군을 기다리고 시마즈군을 두드리도록 진언했습니다만, 히데히사가 강을 건너 시마즈군을 공격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 결국 저녁에 출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상했던 시마즈군이 선진의 센석대를 기습. 시마즈 씨의 가예, 「낚시 야부세」(미스케 부대가 정면에서 적과 싸워, 패주하는 척하고 적을 낚아, 좌우에 숨어 있던 별동대가 적을 두드리는)가 확실히 정해져, 센석대는 대 타격을 받습니다. 제2군의 장연가부 신친들도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결국 총 무너지게. 여기에서 신부모는 토벌당하고 시코쿠세도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000명이 전사. 쓰루가성도 낙성했습니다. 나가소가부 전 부모는 도망쳐 연장했지만, 도요토미군은 시마즈군에 대패했습니다. 덧붙여 이 실패로 센고쿠 히데히사는 사누키국을 개역되어 고야산에 추방되었습니다만, 그 후 오다와라 정벌에서 활약한 것으로 가신에 복귀하고 있습니다.

다음 12월 13일, 시마즈군은 오오토모 종린이 지키는 단생도성(오이타현 우스키시)의 성 공격을 개시. 그러나 소린은 포르투갈인 선교사로부터 입수한 대포 '프랑키포' 등을 활용해 시마즈군을 격퇴했습니다. 포르투갈과 관계가 깊은 키리시탄 다이묘의 종인이기 때문에 그 대비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 시마즈군은 기쓰키성(오이타현 기쓰키시) 공격 등을 실시합니다만 결국 패배. 각각 분고나 히나타국의 자성에서 연을 넘게 됩니다.

규슈평정②히데요시가 출진, 부대편제는?

규슈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텐쇼 14년(1586년) 12월 1일, 다음해 3월에 규슈에 스스로 출진하는 것을 제장에게 알려, 오사카에 병사를 모으라고 명령합니다. 게다가 이시다 미츠나리, 오타니 요시카즈, 나가타마 마사야를 병량 봉행에 임명해 병준을 담당시킵니다.

그리고 텐쇼 15년(1587년) 설날, 히데요시는 축하식으로 규슈 평정의 부대 편제를 발표했습니다. 총 20만의 군세를 히고 방면군과 히나타 방면군의 2군으로 나누고, 히고 방면군은 히데요시 자신이 총 대장에 대해, 히나타 방면군은 동생의 도요토미 히데나가를 총 대장으로 정했습니다. 주요 부대 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고 방면군(니시큐슈의 치쿠젠·히고 경유로 사쓰마에)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치반대:모리 요시나리・타카하시 전종・죠이 아사보
2번대 : 마에노 나가야스, 아카마츠 광영, 아카시 노리미, 벳쇼 중종
3번대:나카가와 히데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타카야마 나가보
4번대:호소카와 타다오키・오카모토 료카츠
5번대 : 탄바 나가시게·이코마 친정
6번대 : 이케다 테루마사, 하야시 히데타다, 이나바 사다도리
7번대 : 하세가와 히데이치, 아오야마 타다모토, 기무라 시게바시, 오타 이치요시
팔번대:호리 히데마사・무라카미 요시아키
구번대 : 가모 씨향
십번대 : 마에다 토시야
11번대: 도요토미 히데카츠
히나타 방면군(히가시큐슈의 분고·히나타 경유로 사쓰마에)
총대장 : 도요토미 히데나가
이치 반대 : 구로다 칸베 에이 · 하스스카 가정
2번대:코바야카와 타카케이・요시카와 원장
3번대:모리키모토
4번대 : 우키다 히데야, 미야베 계윤, 인하중
고번대: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이 외 번외로 츠츠이 쇼지

규슈 평정 ③ 마스토미 성의 「하룻밤 성」

부대 편제에 따라, 텐쇼 15년(1587년) 1월 25일, 우선은 우키타 히데야가 출진. 그 후, 2월 10일에 도요토미 히데나가, 3월 1일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진했습니다. 3월 상순에는 히데나가는 고쿠라에 도착했습니다만, 곧바로 시마즈씨를 공격하지 않고, 고야산의 스님을 개입시켜 강화를 호소합니다. 그러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것을 거부. 기타큐슈를 포기하고 도요토미군의 추격을 피하고, 히나타, 오구미(가고시마현 동부), 사쓰마로 수비를 굳히고 군세를 기다립니다. 3월 20일에는 히나타국의 도요군 성(미야자키현 서도시 도모군)에서 시마즈 요시가쿠, 요시히사, 요시히로의 3명으로 군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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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모토 나오코
작성자(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