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미츠나리 (1/2)히데요시의 우수한 관료이며 충신이었던 무장

이시다 미츠나리

이시다 미츠나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이시다 미츠나리(1560년~1600년)
출생지
시가현
관련 성, 절, 신사
오가키성

오가키성

오시

오시

나가하마 성

나가하마 성

다와야마성

다와야마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의 삼영 걸 중 한 명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이상으로 토벌된 뒤, 천하 통일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히데요시 밑에서 오봉행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해, 지지한 것이 이시다 미츠나리입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천하를 노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쓰러뜨리기 위해 모리키모토를 총대장으로 서군을 결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최후는 참수되어 악역처럼 취급됩니다만, 정말로 그랬습니까? 이번에는 이시다 미츠나리를 다룹니다.

하 시바 히데요시에 사관

에이로쿠 3년(1560), 이시다 마사하루의 차남으로서 오미쿠니 사카타군 이시다무라(현재의 시가현 나가하마시 이시다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명은 사요시.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고 오미나가하마 성주가 된 텐쇼 2년(1574)경부터, 아버지·정계, 형·마스미와 함께 히데요시에 사관하고, 미츠나리는 코성으로 섬깁니다.
텐쇼 10년(1582) 6월, 노부나가가 가신의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신에 의해 혼노지에서 자해, 당시 중국 지방에 있던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토벌하는 것으로의 오다가 안에서 대두해 갔습니다. 미츠나리도 히데요시의 측근으로 분전합니다.
텐쇼 11년(1583), 카츠가다케의 싸움에서는 시바타 카츠가군의 동향을 탐구하는 정찰 행동을 담당하고, 또 선마중으로서 가장 창의 무공을 꼽았습니다. 텐쇼 12년(1584),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에도 종군. 같은 해, 오미 국 가모군의 검지 봉행을 맡는 등, 다른 측근과 함께 히데요시의 천하취에 공헌해 갑니다.

도요토미 정권의 우수한 관료로서 활약

텐쇼 13년(1585) 히데요시의 관백 취임에 수반해, 이시다 미츠나리는 종5위하·치베 소스케에 서 됩니다. 같은 해 말에 히데요시에서 오미국수구(현재의 시가현 고가시) 4만석의 성주에게 발탁되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텐쇼 14년(1586), 당시 명장으로서 유명했던 섬 청흥(섬 좌근)을 지행의 절반을 주어 부르셨다고 합니다. 히데요시는 이 삼성의 행동에 경악하면서 동시에 칭찬했습니다. 또한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에서 사카이 봉행으로 임명되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다음 텐쇼 15년(1587)의 규슈 평정에 대군을 동원해, 비교적 단기간에 평정을 끝냈습니다만, 그 승인의 하나에 수군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대군을 동원·수송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히데요시의 원정을 지지한 것은, 후방의 병량·무구 등의 무게를 담당한 삼성등 유능한 료료들이었습니다.
규슈 평정 후, 하카타 봉행을 명령받아 군감의 쿠로다 다카타카(쿠로다 간베에) 등과 함께 하카타마치 나누고, 부흥에 종사합니다. 또, 텐쇼 16년(1588), 규슈 사쓰마(현재의 가고시마현)의 시마즈가의 취차가 되어, 히데요시에의 속견을 알선했습니다. 이렇게 삼성은 행정, 외교로 두각을 나타내 가서 존재감을 강화해 나갑니다.

텐쇼 18년(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하시바 히데요시)는 관동의 호조가(고호조가)의 오다와라 정벌을 실시했습니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로부터 호죠씨의 지성의 다테바야시성, 인성 공격을 명령받습니다. 오시 성 공격에서는 모토 아라카와의 물을, 성 주위에 끌어들여 물 공격 (성을 물에 가라앉히고 병량 공격으로 하는 싸움 방법)을 실시했습니다. 관동 각지의 호조가의 지성은 대부분이 함락했지만, 오시조만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전의 지휘관으로서는 고생했지만, 동북 지방에 있어서의 검지 봉행을 맡는 등 착실하게 실적을 거듭해 도요토미가의 행정 관료로서 도약해 갑니다.

텐쇼 19년(1591), 창고 입지(히데요시의 직할지)의 대관으로서 사와야마성(현재의 시가현 히코네시)에 들어갑니다.
분록 원년(1592)부터 문록의 역(조선 출병)에서는 도해해 마스다 나가모리와 오오타니 요시카즈와 함께 한성에 주둔하여 조선 출병의 총봉행을 맡습니다. 분로쿠 2년(1593), 벽제관 전투와 고슈 산성 전투에 참가. 그 후, 명군의 강화사·사용 아즈사, 서일관을 수반해 히젠 나고야성으로 돌아오는 등, 명과의 강화 교섭에 적극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와 현지의 연락역이라는 입장의 행동은, 도요토미 가중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 무단파의 반발을 초래했습니다.

분로쿠 4년(1595), 히데요시의 조카·도요토미 히데지가 모반의 혐의에 의해 규탄되어(히데지 사건), 고야산에 추방 위에 절복을 명령받았습니다.
이때, 히데지가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가신은 낭인이 되어 버립니다. 거기서 삼성은, 히데지의 가신인 와카에 팔인중이나 그 외의 가신을 자신의 아래에 받아들였습니다.
이때 가신이 된 것이, 마이 효고(마에노 나가야스의 사위) 등으로 이시다가의 핵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히데지의 구령 중 오미 7만석이 삼성의 대관지가 됩니다. 같은 해에 키나이와 동국을 잇는 요충으로서, 오미 사와산 19만 4,000석의 소령을 히데요시로부터 주어져 정식으로 사와산 성주가 되었습니다.

게이쵸 2년(1597), 게이쵸의 역이 시작되면 국내에서 후방 지원을 실시합니다. 한편, 이 해에 일어난 울산성의 싸움 때에 재조선의 제장에 의해 전선 축소가 제안되어, 이것에 격노한 히데요시에 의해 제안에 참가한 다이묘가 책책이나 소령의 일부 몰수 등의 처분 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현지로부터 상황을 보고한 군목부는 미츠나리의 인연인 후쿠하라 나가토라들이며, 처분을 받은 쿠로다 나가마사, 벌스가 가정들은, 이 처분을 미츠나리·나가토미가 칭찬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해, 그들과 삼성이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게이쵸 3년(1598년) 히데요시는, 조선의 역으로 불편함이 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히데요시의 요시의 조카)의 영지였던 치쿠고국·쓰쿠젠국을 거론해, 미츠나리에게 주려고 했습니다만, 미츠나리는 거절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치쿠고국·치쿠젠국은 히데요시의 창고지가 되어, 삼성은 그 대관에 임명되어 나이지마성을 주어졌습니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에 히데요시가 몰렸기 때문에 게이쵸의 역은 종전이 되어 출정군의 철병에 종사합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도요토미가의 가독은 嫡男의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철병이 진행되는 가운데, 정권 내부에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을 도요토미가의 관료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와, 카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도요토미가의 무장을 중심으로 하는 무단파가 형성되어 대립을 깊게 해 갑니다.

게이쵸 3년(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면하에서 후쿠시마 마사노리, 쿠로다 나가마사, 벌스카가정 등 무단파 제후와 혼인 관계를 맺으려고 획책. 다음 게이쵸 4년(1599년) 초, 이에야스에 의한 연계 계획이 발각되었습니다.
이것은 히데요시의 생전, 분로쿠 4년(1595년) 8월에 만들어진 「오구리」에 있어서의 다이묘간의 사적 혼인의 금지 조항을 위반하는 행위라고 해서, 마에다 토시야를 중심으로 하는 제 다이묘 에서 이에야스 탄핵의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사대로 5봉행에 의한 문책사가 이에야스에게 보내지는 한편, 이에야스도 국허로부터 병사를 불러들이는 등 대립은 선예화했습니다만, 2월 12일에 이에야스가 기청문을 제출하는 것 등에 의해 일단의 해결 보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에 마에다 토시야가 병사하면, 그 직후에 카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타다오키, 아사노 유키나가, 이케다 테루마사, 카토 카아키의 7장이, 삼성의 오사카 저택을 습격하는 사건(이시다 미츠나리 습격 사건 ) 발생.
7장과 삼성은 후시미성 내외에서 노려보는 상황이 되어, 중재에 나선 이에야스에 의해 화담이 성립합니다. 그 결과 미츠나리는 5봉행의 자리를 물러나 사와야마성에 귀성했습니다.
게이쵸 4년(1599년) 11월에는 이에야스 암살 계획에의 관여를 의심된 마에다 토시나가가, 아버지·이가로부터 계승하고 있던 대로의 지위를 사실상 잃고, 아사노 나가마사도 봉행직을 풀려 영국의 카이국에 가게가 되어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주도권은 이에야스가 붙잡아 가게 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육안국 아이즈를 영위하고 있던 우에스기 경승을 토벌하기 위해 오사카를 발합니다(아이즈 정벌).
이 때, 미츠나리와 대립하고 있던 무단파가 아이즈 정벌의 핵심이 되어, 오사카를 발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