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타다오키 (1/2)히데요시코 키치의 칠장

호소카와 충흥

호소카와 충흥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소카와 충흥(1563년~1646년)
출생지
교토부
관련 성
고쿠라성

고쿠라성

나카츠 성

나카츠 성

야시로성

야시로성

가쓰류지 성

가쓰류지 성

타나베 성

타나베 성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

관련 사건

싸움에 새로워진 전국 시대, 그런 거친 시대에도 문화의 꽃은 크게 피었습니다. 차의 탕이나 연가입니다. 전국의 세상에서 문화를 키우면서 무로마치 막부에서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섬긴 다이묘가 호소카와 타다오키입니다. 충흥은 호소카와 후지 타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동맹이었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딸 타마코(가라샤)를 떠올렸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충흥은 구마모토의 다이묘에게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이번에는 호소카와 타다 흥을 살펴 보겠습니다.

충흥이 태어난 호소카와가

호소카와 타다흥이 태어난 호소카와 씨. 호소카와씨라고 하면 오히토의 난으로 동군의 총수가 된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유명합니다만,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집은 그 호소카와씨의 서류에 해당합니다.
호소카와씨는 나중에 무로마치 막부를 흥미롭게 하는 아시카가씨의 일족이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미카와 국 액전군 호소카와고(현재의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호소카와초 주변)를 지배해, 이 토지를 명자로 해 호소카와를 자칭합니다.
남북조 시대가 되면 아시카가에 따라 활약했습니다. 아시카가 존씨는 지지해 준 호소카와씨를 우대, 기내(긴키) 시코쿠를 중심으로 8개국의 수호로 합니다. 또 장군가 중에서도 높은 정도, 관령에 취임할 수 있는 3관령의 하나로 했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버지, 호소카와 후지 타카는 미후치 하루원의 차남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아버지 청원의 형이었던 호소카와가의 지류, 호소카와 전상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이어받은 집 등은 여러 설 있습니다) 후지타카는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15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깁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쇼군이 되었습니다만, 나중에 희미해져 도시를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후지 타카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됩니다.

충흥의 어린 시절

에이로쿠 6년(1563), 호소카와 충흥은 교토에서 태어납니다.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섬기고 있던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장남으로서 탄생했습니다.
에이로쿠 8년(1565) 에이로쿠의 변이 일어나 후지타카가 섬기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됩니다. 요시테루가 죽임으로써 장군 후계 문제가 일어나 후지타카 등 구 요시테루 가신들은 오와리, 미노국의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해 요시테루의 제이쇼를 담당합니다. 요시아키는 15대 장군에 종사했지만, 이윽고 노부나가와 요시아키가 대립. 노부나가는 요시아키를 추방하고, 무로마치 막부는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섬기고 있던 호소카와 후지 타카시는 노부나가에 신종, 아이의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노부나가의 남남 신부를 섬겼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텐쇼 5년(1577) 15세에 오다가가 실시한 기슈 정벌에 참가해 초진을 장식합니다.
텐쇼 6년(1578)에 전복. 같은 해,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추천도 있어,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맹우였던 아케치 미츠히데의 삼녀, 타마코(가라샤)와 결혼합니다.
텐쇼 7년(1579)에는, 호소카와 후지 타카시, 충흥 부모와 자식, 더욱 현의 아케치 미츠히데가 단고국(현재의 효고현) 수호였던 일색가를 멸망합니다. 이듬해에는 단고국을 공격한 공적으로서 호소카와가는 단고의 남반부를 영지로 주어졌습니다.

충흥과 혼노지의 변

그런데 텐쇼 10년(1582) 6월 2일. 호소카와 타다흥의 현, 아케치 미츠히데는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혼노지에서 자해에 몰아넣었습니다.
미츠히데는 혼노지의 변의 직후, 호소카와 후지타카, 충흥의 부자를 아군에게 초대합니다. 그러나 호소카와가는 명확한 답변을 내지 않고 노부나가의 상에 옷을 입고 면도하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사실상 아케치가에 대한 비난의 의사표시입니다. 이때, 면도한 것으로부터 부토 타카시는 유제, 충흥은 삼제라고 호했습니다.

또한 충흥의 아내로 미츠히데의 삼녀 계란을 유폐합니다. 또,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이때 은거했기 때문에 영지는 아들의 충흥이 통치하고, 충흥은 단고 미야즈 성주가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부자와 협력을 거절한 아케치 미츠히데는 하 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격돌한 야마자키의 싸움으로 패사합니다. 호소카와가는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한 하 시바 히데요시와 간의가 되어, 미쓰히데측에 붙은 단고국 북부의 일색가를 잃고, 히데요시로부터 단고 전역의 영유를 허락되었습니다.

도요토미가의 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자해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들어가면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활약합니다.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으로부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토, 조선의 역에 참전합니다. 그동안 충흥은 종사위 아래 사무종에게 서임에 서임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호소카와 타다오키. 충흥은 이 도요토미가의 시대에 무인과는 다른 재능을 개화시켜 가는 문화인으로서의 측면입니다.

당시 유행한 차의 온천에서는 千利休에 사사하고 利休七哲의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리큐가 히데요시형 절복을 명령받았을 때, 리큐에 연고가 있는 여러 다이묘 가운데서 가서 갔던 사람은, 충흥과 후루타 오리베 뿐이었다고 합니다.
또, 무구나 갑옷의 작성, 와카, 노, 회화의 조형에도 깊이 종사했습니다. 아버지의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고금전수를 받아 근세가학을 확립시켜, 무예백반, 와카, 다도, 연가, 걷어차기 등의 조예에 깊고, 당대일의 교양인이었던 피를 당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분로쿠 4년(1595)의 이야기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 세키시로 도요토미 히데지에게 혐의가 걸려 히데지는 절복을 명하였습니다. 이때 호소카와가는 히데지에 빚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지와의 친밀한 사이를 의심받습니다. 가로의 마츠이 야스유키는 분주해 돈을 세우고, 히데요시에 반납했습니다. 이때 호소카와가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게이쵸 3년(1598)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망합니다. 이듬해 도요토미가의 필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특히 추거해 호소카와가에 단고국 12만석 외에 규슈 분고국기축 6만석을 가증합니다. 호소카와가는 합계 18만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규슈에는 마츠이 야스유키 등의 중신을 두고 통치에 참가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호소카와 충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거리를 줄여 갑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3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히데요시가 죽으면 봉행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와 히데요시코 키리의 무장들 사이에 轋轢가 태어나, 미츠나리는 무장들에게 습격을 받습니다. 이때 호소카와 타다오키도 습격측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5년(1600) 대로의 1명, 우에스기 경승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동을 문제시합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경승에 모반의 의심이 있다고 정토의 군을 올렸습니다, 충흥도 이 군에 합류합니다.
이에야스들 정토의 군은 오사카를 나와 관동까지 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사카에서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거병했습니다.

이때, 이에야스의 군에 참가하고 있던 무장들의 처자는 오사카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충흥의 아내 계란(가라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처자를 인질로 취해 이에야스에 붙어 있는 무장들을 이반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무장의 처자들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많은 처자가 저택을 빠져나가 도망쳤습니다만, 계란은 도망치는 것도 인질이 되는 일도 거부합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우에스기 정토의 군이 움직이면, 이시다 미츠나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계란에게는 인질이 될 정도라면 명예를 지키고 자해하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충흥의 가혹한 성격의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었던 계란은 자해를 거부하고 가신에게 개착시켜 시신은 남지 않도록 불을 붙였다.
계란이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은 것을 알게 된 충흥은 분기하고,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활약합니다. 충흥의 분전도 있어,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해, 후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잡혔습니다.

도쿠가와 시대

호소카와가는 세키가하라의 싸움을 통해 본전인 세키가하라, 그 전초전이 된 단고쿠니타나베성의 공방전, 비행지인 규슈의 분고국에서 싸움 도쿠가와가에 크게 공헌합니다.
도쿠가와가는 공헌이 컸던 호소카와 충흥의 본령인 단고국을 부르고, 토요젠국 나카츠를 줍니다. 그때까지의 분고 기축과 합치면 40만석이 되지 않는 다이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