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키모토(1/2)중국 지방의 프린스

모리 휘원

모리 휘원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모리키모토(1553년~1625년)
출생지
히로시마현
관련 성
하기성터

하기성터

히로시마 성

히로시마 성

오사카성

오사카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 중국 지방의 안예국(현재의 히로시마현)에서 나와 대세력까지 성장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그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가 모리 테루모토였습니다. 아키모토는 도카이, 킨키 지방에서 발흥한 오다 노부나가와 대립, 그 후 대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했습니다. 게다가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는 반토쿠가와 쪽의 서군의 대장으로서 추측됩니다. 이번에는 그런 중국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시대를 뛰어 넘은 모리 휘모토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중국 지방의 수컷, 모리가

모리키모토가 태어난 것은 모리씨. 모리씨는 어떤 집이었을까요.
모리씨는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가인, 오에 히로모토의 사남, 모리 계광을 조로 합니다. 계광이 자칭한 「모리」의 성은, 광원으로부터 계승한 소령의 사가미쿠니 아이코군 모리(모리)장으로부터 붙여졌습니다.

계광은 싸움으로 패사합니다만, 에치고국과 안예국에 있던 소령을 아이들이 계승한 것으로부터, 그 자손은 에치고 모리씨와 아키모리씨로 나뉘어 존속합니다.
에치고 모리 씨는 그 후 호조 씨와 야스다 씨로 헤어져 갔고, 전국 시대에는 유력한 국인으로서 호조 타카히로 등을 배출했습니다.

아키 모리 씨는 가마쿠라 시대의 끝에 요시다 고리야마로 이주합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가면 안예국의 유력한 국인 영주로서 야마나 씨와 오우치 씨를 따르면서 성장합니다. 휘원의 할아버지인 모리 모토나리가 당주로 일하자 일대에 주변의 국인중을 받아들이면서 타세력을 배제해 나가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휘원의 삶에서 가독 계승

천문 22년(1553) 1월, 나중에 중국 지방의 수컷이 되는 모리 모토나리의 嫡男, 모리 타카모토의 장남(즉 모토나리의 손자)로서, 안예국에서 탄생합니다. 유명은 유키쓰루마루(고우츠루마루)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 휘원이 태어난 당시, 모리가는 주방국(현재의 야마구치현)의 대국, 오우치가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오우치가는 가신의 도료현의 반란에 맞는 사실상 멸망합니다. 휘원의 태어난 다음 해의 천문 24년(1555) 이쓰쿠시마의 싸움이 행해져, 이 싸움에 승리한 모리가는 도약했습니다.
 
그런데 휘원이 10세 때, 에이로쿠 6년(1563)에 아버지인 다카모토가 급사합니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의 모토나리가 후견하는 형태로 테루모토가 모리가의 가독을 계승했습니다. 에이로쿠 8년(1565)에는 요시다군 야마시로에서 전복, 무로마치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휘」의 편망을 받아, 휘원이라고 자칭하게 됩니다.
이 전복 이후, 할아버지의 모토나리와 숙부(모리 모토나리의 차남, 3남) 요시카와 하루모토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도움을 얻어, 모리가는 통치 체제를 정돈했습니다.

중국지방의 패권안정에

모리키모토가 모토나리의 후견을 얻어 가독을 이어받았을 때, 모리가는 산인지방의 아마코씨의 잔당과 주방국의 오우치씨의 잔당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편 긴키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 15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봉사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도중. 긴키로부터 도카이 지방을 지배하에 두는 오다가와 중국 지방을 지배하에 두는 모리가는, 이 시점에서는 서로 간섭하는 것을 피해 각각의 세력 확대를 용인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미작·비젠국(현재의 오카야마현)에도 손을 뻗어, 휘원은 중국 지방에서 규슈 북부까지의 세력 확대를 도모합니다.
그런 가운데 모토가메 2년(1571) 6월에 휘모토를 후견하고 있던 할아버지의 모토나리가 사망했습니다. 여기에서 삼촌의 요시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타카에(모리 료가와)에 지지를 받으면서 아키모토는 모리가의 운영을 담당해 갑니다.

오다가와의 대립

텐쇼 원년(1573),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옹립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와 모로를 나눕니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교토에서 추방했습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는 모리키모토도 오다 노부나가도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면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리가와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으로 오다가는 모리가와 대립하고 있던 산요도의 우라카미가, 산음도의 아마가가를 지원해 모리가의 견제로 했습니다.

텐쇼 4년(1576),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모리 가령인 비고국(히로시마현 동부) 도모(토모)로 도망쳐 왔습니다. 아키모토는 요시아키를 도모에서 비호하는 한편으로, 모리가와 대립하는 우라카미가, 아마코가를 지원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와 대치하는 것을 결정합니다.
모리키모토는 호쿠리쿠 지방의 우에스기 겐신, 긴키의 혼간지 현여와 연락을 취해 오다가의 포위망을 구축했습니다, 제3차 노부나가 포위망이라고도 불리는 포위 체제입니다. 포위망을 구축한 휘원은 지배하를 동쪽으로 동쪽으로 확대시켜 가고, 중국 지방 외, 사누키국(현재의 가가와현)이나 도요젠국(현재의 후쿠오카현) 등의 일부를 지배하에 두고 모리가 최대의 판도를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모리가와 오다가는 하리마국(현재의 효고현)이나 섭진국(현재의 오사카부)을 경계로 일진 일퇴의 공방을 실시합니다.

그런데 이 장기화한 공방은 모리가의 체력을 빼앗아 갔습니다. 포위망을 담당하고 있던 혼간지 현여도 오다 노부나가에게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화목을 묶어 이탈해 갑니다.
이렇게 모리가가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텐쇼 10년(1582),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파견해 모리가의 성이었던 비나카 타카마쓰성을 사이에 두고 모리가와 대치했습니다. 모리와 마주한 하시바 히데요시였지만, 독력으로는 모리가를 물리칠 수 없으면 오다 노부나가의 출마를 요청합니다. 여기서 노부나가도 스스로 출진해 모리가와 암컷을 결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도요토미(하 시바) 히데요시에 신종

텐쇼 10년(1582) 5월 말, 오다 노부나가는 모리가와 암컷을 결정하기 위해 출진합니다. 교토의 혼노지에서, 부하의 무장들에게 진군의 지시를 내리면서 체재했습니다. 모리 휘원은 위기 상황에 빠진다. 그런데 다음 6월 오다가의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교토에서 노부나가를 자해에 몰아넣은 혼노지의 이상입니다.

이것을 재빨리 알게 된 것은 비나카 타카마쓰 성을 둘러싸고 모리가와 마주하고 있던 하 시바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에 관해서는 숨기면서 정전을 휘원에게 타진해, 휘원도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모리가도 그 후에 혼노지의 이상을 알았는데, 정전의 약속을 지키고 추격을 하는 것은 삼가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가와 정전한 일로 주인 오다 노부나가를 자해에 몰아넣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그 후의 오다가 내부의 정치 투쟁을 우위로 진행시킵니다.

텐쇼 13년(1585) 1월, 테루모토는 히데요시와 영지의 배분을 결정 화목했습니다. 여기서 모리키모토는 독립한 다이묘로부터 도요토미가의 부하의 다이묘가 됩니다. 다만 중국 지방의 대부분을 영주하는 휘원은 도요토미 정권 중에서도 유수의 다이묘로 위치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리 테루모토는, 텐쇼 4년부터 계속해 온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싸움을 종결시켰습니다.

이듬해의 텐쇼 14년(1586) 모리가를 계속 지지해 온 모리 료가와의 한사람, 삼촌의 요시카와 모토하루가 죽습니다. 아키모토는 남은 삼촌의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의 도움을 얻으면서 도요토미 정권하에 기슈, 시코쿠, 규슈에 출병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공헌합니다.
텐쇼 17년(1589) 지금까지 모리가의 거성이었던 요시다 고리야마에서 편리한 히로시마로 이동하기 위해 히로시마성의 축성을 개시했습니다.
분록 원년(1592) 도요토미가는 조선 출병을 시작한다. 서국의 여러 다이묘는 출진을 명령받아 모리가도 출병했습니다. 그리고 게이쵸 2년(1597), 모리 료가와의 삼촌,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사망합니다. 이듬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는 조금 전의 분로쿠 4년(1595), 모리키모토는 히데요시로부터 오오오로 임명되었습니다. 고대로에는 관동을 영지에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있어 도요토미가를 지지하는 중요한 입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죽은 게이쵸 4년(1599), 같은 오대로의 마에다 토시야가 죽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가의 봉행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대립하게 됩니다.
아키모토는 이시다 미츠나리에 주어졌고, 이에 더해 오오오의 우에스기 경승과 우키타 히데야 등도 이시다 쪽에 대해 대립이 격화했습니다.

모리 휘원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