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슈 마치 (1/2)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호쿠 평정, 파문을 불렀다

오슈 처치

오슈 처치

기사 카테고리
사건부
사건명
오슈 처치(1590년)
위치
미야기현・후쿠시마현・이와테현・아오모리현・야마가타현・아키타현
관련 성
센다이성

센다이성

야마가타성

야마가타성

쓰루가성

쓰루가성

하나마키 성

하나마키 성

관련 인물

텐쇼 18년(1590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 통일의 최종 단계로서 실시한 도호쿠 지방의 영토 처치가 「오슈 마치」입니다. 당시의 도호쿠 지방은 육오국(현재의 후쿠시마·미야기·이와테·아오모리현)과 데바국(야마가타·아키타현)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쿠바”라고 불리고 있어, 이 때문에 별명 “오쿠바 마치 "라고도합니다. 히데요시의 독단으로 영토 배분을 실시한 것으로, 나중에 수많은 일소나 난을 낳게 된 오슈 마치에 대해서, 이번은 해설해 갑니다.

오슈 처치의 배경, 「오다와라 정벌」

오슈 마치의 배경이 된 싸움이, 텐쇼 18년(1590년) 초부터 7월까지에 걸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호조 일족과 싸운 「오다와라 정벌」입니다. 히데요시는 텐쇼 13년(1585년)에 시코쿠를, 텐쇼 15년(1587년)에 규슈를 평정하고 있어, 천하 통일까지 남기는 관동과 도호쿠라는 상태였습니다. 관동을 다스리는 일대 세력이었던 호조씨는 히데요시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 어떻게든 배제, 또는 부하에 받아들여 천하 통일을 완수하려고 히데요시는 생각합니다.

히데요시는 우선 호조 씨 마사와 씨직에게 상경해 신종하도록 부르겠지만, 호조 씨는 상경을 계속 거부합니다. 그리고 텐쇼 17년(1589년), 호조씨가 사나다씨와 싸우고 있던 우에노국·누마타령(군마현 누마타시)의 영유 문제에 대해서, 히데요시가 호조씨의 요청을 받아 호조씨에게 유리한 형태로 강제로 해결합니다. 「누마다 재정」이라고 불리는 히데요시의 결정에 의해, 누마타령은 3만석 중 2만석을 호조씨에게, 1만석을 사나다씨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누마타령은 교통의 요충으로 북관동에 있어서의 중요한 전략 거점. 호조씨가 원했던 것도 무리가 없습니다.

히데요시는 「호조 씨에게는 은혜를 팔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시 상가를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호조씨는 상경시기를 구다그다와 미루게 합니다. 이 대응을 보고, 히데요시는 서서히 호조씨를 토벌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호조 쪽의 이노마타 쿠니노리가 누마타에 있는 사나다 영내의 명호 모모성을 탈취. 누마타 재정에서의 결정을 반고로 하는 행동에 히데요시는 격노합니다. 게다가 호조씨 쿠니가 시모노국(도치기현)의 우쓰노미야 쿠니즈나를 마음대로 공격하는 사건도 발생. 이것은 히데요시가 텐쇼 13년(1585년)에 발행한 「소무사령(다이묘끼리의 멋쟁이를 금한다)」를 위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쌓인 결과,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을 결의해, 11월경부터 제장에게 내춘 호조씨 토벌을 향해 출진하는 것을 통지합니다. 그리고 다음 텐쇼 18년(1590년) 2월부터 21만 대군을 이끌고 오다와라 정벌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다와라 정벌은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호조 일족의 싸움이 아닙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정벌에 즈음해, 스스로의 부하에 가세해 각지의 무장에 전에 참가하도록 명령을 발하고 있어, 히데요시의 도쿠가와 히데요시나 마에다 토시야, 우에스기 경승 등 다양한 무장이 모였습니다. 도호쿠 지방에서도 육오국(아오모리현)의 남부 신직 등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오다와라 정벌은 호조씨를 쓰러뜨리기 위한 싸움인 동시에 「히데요시를 따르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전이기도 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약 10만 대군을 이끌고 호조 일족이 담긴 오다와라성을 포위합니다. 호조 일족은 오다와라성에 약 100일 농성했지만, 7월 5일에 호조씨 나오토가 항복을 권고. 7월 11일 오다와라성은 개성하고 오다와라 정벌은 종료되었습니다.

우츠노미야와 아이즈에서 「처치」발표

오다와라 정벌을 마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천하통일을 위해 남겨진 동북지방에 대한 대응을 바로 시작합니다. 7월 17일에 가마쿠라에서 시모노국으로 향해, 26일에 우츠노미야성에 입성. 여기서 관동, 오우와의 다이묘들을 모아 오다와라 정벌 후의 호조가의 영지나 기타칸토, 동북의 일부에 대해서 영토 배분을 실시했습니다. 여기서의 결정은 「우쓰노미야 마치」라고 불립니다. 히데요시가 우쓰노미야에서 영토의 배분을 실시한 것은, 겐토요아사가 문치 5년(1189년)의 오슈 합전(오슈 후지와라씨·겐 요시츠네와의 싸움) 때, 우쓰노미야 다이묘진에 참배해 오슈를 평정했다 일이 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츠노미야에는 7월 28일, 다테 마사무네도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사무네는 처치의 내용에 대해 히데요시로부터 의견 청취를 요구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결국 2일 지각해 버렸습니다. 덧붙여 마사무네는 오다와라 정벌 때도, 히데요시에 붙을지 망설인 6월에 늦게 참전. 이 때는 하얀 장속으로 히데요시와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 후,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안내하에, 가모 씨향과 아사노 나가마사 등으로 구성된 「오슈 마치군」과 함께 오슈를 순찰합니다. 오슈 마치군은 그대로 북상하고 8월 6일에는 시라카와(후쿠시마현 시라카와시)에 도착. 도중에 육오국의 카사이씨가 습격을 받습니다만 이것을 격퇴해, 9일에는 아이즈 구로카와성(현 아이즈 와카마츠성)에 입성합니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나머지 처치를 실시. 가사이씨를 비롯한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지 않았던 국인 영주들 등의 처우를 결정했습니다. 이 때, 카마 씨향이 새롭게 아이즈의 영주가 되는 것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8월 15일 전후에 아이즈를 출립해, 9월에는 교토에 돌아옵니다만, 오슈 마치군은 그대로 북진했습니다. 그리고,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개역된, 린누키씨의 성이었던 토리야가사키성(이와테현 하나마키시)에 아사노 나가마사가 입성. 현재는 「하나마키성」이라고 불리는 도리가사키성을 거점화했습니다. 결국 오슈 마치군은 이와테현 히라이즈미 주변까지 진행되어 와가씨를 비롯한 현지 영주들을 제압. 그 후는 나가마사의 가신이 대관으로서 각지에 머물러 히데요시의 생명으로 검지 등을 실시하는 것과 동시에 신체제로의 이행을 촉구합니다. 9월에는 대관들을 남기고 오슈 마치군은 철수했습니다.

오슈 마치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슈 처치에 의한 영토조치는 오다와라 정벌에 참가한 무장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언급합니다. 한편, 다테 마사무네는 오다와라 정벌의 지참에 가세해, 텐쇼 17년(1589년)의 「스리우에하라의 싸움」으로, 소무사령을 무시하고 아이즈의 노나 요시히로를 공격한 것 등을 떼어내, 오우 약 114만석에서 아이즈 4군 등을 몰수해 72만국으로 감봉하였습니다.

오슈 마치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인물
쿠리모토 나오코
작성자(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