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시마성은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시로야마초에 위치한 히라야마성입니다. 세키가하라 합전의 다음 해, 게이쵸 6년(1601년) 시마즈 타다히네에 의해 축성되었습니다. 옥형의 형상이 학이 날개를 펼친 것 같았기 때문에, 쓰루마루성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에도시대를 통해 사쓰마번의 번청이었던 가고시마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남북조 시대, 당시의 가고시마군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우에야마씨가 「우에노야마성」 및 「우에야마성」이라고 하는 성이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그 후,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모토요리 아침보다 시마즈소 지두직에 임명된 이래, 사쓰마·오스미·히나타의 수호직 등을 겸임하면서 세력을 늘려 온 시마즈씨에게 이 성이 새겨졌습니다. 우에야마씨의 역사에 대해서는 현재도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가고시마군에서 떨어진 후 사쿠라지마 방면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한편, 시마즈씨는 무로마치 시대부터 세력을 확대하고, 전국 시대가 되면 히나타의 다이묘였던 이토씨를 구축해, 전국 다이묘로서 사쓰마국・오스미국・히나타국의 삼슈를 통일하는 등 규슈 제일의 다이묘로 성장합니다. 아즈치모모야마시대 시마즈씨는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소령을 안도한 뒤 조선의 역으로 눈부신 무훈을 올려 5만석의 가증을 받았습니다. 이것에 의해 시마즈씨의 소령은 61만이 되어, 도쿠가와씨·우에스기씨·모리씨 등에 이은 제5위의 소령이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게이쵸 5년(1600년)에 발발한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는, 17대째 당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서군에 아군했지만, 시마즈 무네가 최고 책임자인 16대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3년에 이르는 전후 교섭을 실시해, 전소령 안도를 인정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마즈 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따라 "사쓰마 번"으로 막번 체제에 통합됩니다. 가고시마성은 이러한 정치 정세 속, 시마즈 요시히로의 자식 시마즈 충항에 의해 건축되었습니다.
에도시대의 가고시마성
가고시마성은, 77만석이라고 하는 가가번에 이은 다이묘의 거성으로서 쌓아 올렸습니다만, 천수 등 고층 건축이나 다카이시가키 등은 쌓이지 않았습니다. 가고시마성이 쌓은 시마즈 타다히네는 성산의 동쪽 기슭에 옥형을 쌓아 거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을 세운 이유로 막부에 대한 협순의 의사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 사쓰마번은 중세식 산성을 각지에 남겨 113구획을 각각 가신에게 지키는 외성제도라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라면 성의 수호가 얇아도 안심이라는 것입니다. 완성된 가고시마성은, 북쪽에 혼마루, 남쪽에 니노마루가 위치하는 단순한 “야형 만들기”라고 하는 구조로, 방어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뒷산인 성산을 농성을 위한 “후막의 성”으로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도시대 초기에는 성대가 놓여졌지만 점차 출입 금지의 성역이 되어 갔습니다. 덧붙여 이 「성산」은 서남 전쟁의 마지막 결전의 땅이기도 하고, 중복에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1개월간 세워 버렸다고 전해지는 동굴이 있습니다. 이 동굴은 지금도 밖에서 견학할 수 있습니다. 가고시마는 재해가 많은 지역이며, 또한 남국 특유의 고온 다습한 기후로부터 흰개미의 피해가 심해, 에도 시대를 통해서 몇번이나 재건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에도막부 말기가 되어 발발한 「사쓰에이 전쟁」에서는, 영국 군함으로부터 오쿠고덴에 포탄을 몇발인가 박히는 등, 방위상의 결점이 둥글게 되었습니다. 한편, 영국군은 가고시마성의 질소함으로부터 번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절을 천수각과 잘못해서 공격하는 등, 진사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메이지 이후의 가고시마성
에도 막부가 쓰러져 메이지 정부가 성립해 폐번치현이 행해진 후도, 메이지 6년(1873년) 무렵까지는, 「오루문」이라고 하는 대수구의 망문과 1중 2층의 병구소 다문 망 , 角櫓 (구석 망), 서원 조의 궁전 등이 존재하고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7년(1874년)의 화재로 새로운 건물이 소실되어 버려, 이후, 헤세이가 될 때까지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메이지 34년(1901년) 이후, 성지는 제7고등학교 조사관의 교지로서 사용되어, 전후, 가고시마 현립 대학 의학부, 국립 가고시마 대학 의학부 기초 교실 등이 세워졌습니다. 현재는, 가고시마성의 유구로서 이시가키나 호리, 사이고 다카모리의 사학교 터인 데마루 자취, 오테몬과의 사이에 가는 이시바시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혼마루 자취에는 가고시마현 역사 자료 센터 여명관, 니노마루터에는 가고시마 현립 도서관, 가고시마 시립 미술관, 가고시마 현립 박물관 등이 세워져 문화의 발신지가 되고 있습니다. 덧붙여 헤세이 18년(2006년)에 일본의 명성 100선으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레이와 2년(2020년) 오테몬에 해당하는 미루몬이 5년의 세월에 걸쳐 복원되어 일반 공개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가고시마 성지는 에도막부 말기에 빼놓을 수 없는 관광 명소로서 매년 많은 분들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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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평정히데요시가 시마즈를 내려 규슈를 지배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대의 라이벌·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계기로 신종시키고, 텐쇼 13년(1585년)에 나가소카베 모친을 내려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