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리 (1/2)시대의 틈에 농락된 2대째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요토미 히데요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년~1615년)
출생지
오사카부
관련 성
오사카성

오사카성

후시미 모모야마성

후시미 모모야마성

니조성

니조성

관련 사건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로 옮겨가는 가운데, 「만약, 태어난 타이밍이나 출생지가 다르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그 1명.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만년 근처에 태어나 불과 6세에 가독을 이어가게 된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운명은, 「운이 없었다」라는 말이 들어맞을지도 모릅니다. 힘껏 살아 오사카 성 낙성과 함께 흩어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소개합니다.

탄생과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로쿠 2년(1593), 아버지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측실이었던 요도군(아사이 나가마사와 이치의 장녀)의 아이로서 오사카성에서 탄생했습니다. 당시,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바라는 풍습으로서, 일단 버린 형태로 해, 가신의 마츠우라 시게마사가 픽업했다고 합니다. 유명은 拾丸 (히로이 마루)라고 말했습니다. 히데요시가 57세 때에 태어난 아이로, 먼저 태어난 쿠니마츠가 뭉치고 있었기 때문에, 대망의 후계로서 소중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는 많은 정실·측실이 있으면서 아이가 거의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아이가 아닐까 하는 소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진위 정도는 모릅니다.

히데요시가 탄생했을 때에는, 이미 사촌의 도요토미 히데지가 히데요시의 요시코로서 관백을 양도해, 히데요시의 후계자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좀처럼 세계가 태어나지 않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아버지의 히데요시는 당초 히데지와 히데요리의 관계를 잘 조절하기 위해 히데요리가 탄생한 2개월 후인 10월에는 히데요리와 히데지의 딸을 약혼시켜 히데요시에서 히데지, 히데요리라는 정권 계승을 모색 했습니다.

그러나 분로쿠 4년(1595) 7월, 히데요시는 히데지의 관백직을 박탈하고, 그 후 고야산에서 자칼하게 합니다. 동시에, 히데지의 자녀나 처녀도 거의 모두 죽이고, 히데요리의 흔적으로서의 지위를 장약하게 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때,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기청문을 작성해, 다수의 다이묘들에게 혈판 서명시키고 있습니다. 후시미(모모야마)성이 건설되어 히데요시가 거성을 옮기자, 히데요리도 함께 옮겨 살았습니다.

분로쿠 5년(1596) 5월, 히데요리는 처음으로 카미에, 도요토미 아사토미 후지요시로 히데요리라고 자칭합니다. 히데요시는 어갂, 어갯추가 등의 기본법과 오대로, 오봉행 등의 직제를 도입하여 히데요리를 보좌하는 체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게이쵸 3년(1598) 8월에 아버지의 히데요시가 사망. 히데요리는 단 6세에 가독을 이어 히데요시의 유명으로 오사카성으로 옮겼습니다.
히데요시 사후에는 오대로의 필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합의제의 원칙을 무시하고, 점차 영향력을 강화해 정권내의 대립이 깊어져 갑니다. 이에야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에 있던 같은 오오오의 마에다 토시야도 히데요리의 공헌을 맡고 있었지만, 히데요시를 쫓도록 사망해 버린 것으로, 정국의 주도권은 이에야스의 손에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5년(1600), 오봉행이었던 이시다 미츠나리 등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거병하고,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발발합니다. 서군의 총 대장으로서 옹립된 것은, 오대로의 혼자였던 모리 휘원이었습니다. 히데요리는 휘원의 비호하에 놓여졌습니다. 세키가하라에서는 서군, 동군의 쌍방이 「히데요리공을 위해」의 싸움을 대의로 내걸고 있어 실제로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 히데요리는 이에야스를 충의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요토미 정권 내의 권력 싸움이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오대로 필두의 입장을 능숙하게 이용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후 처리로 도요토미가의 소령(이른바 타이코조 입지)을 마음대로 분배해, 일본 전국에 분산되어 배치되어 있던 약 220만석 중, 여러 다이묘에 관리를 맡고 있던 분 을 빼앗는 폭거에 나옵니다.
결과, 히데요리는 섭진·가와치·이즈미의 직할지만을 지행하는 약 65만석의 일대명의 입장에 전락해 버렸습니다.

게다가 게이쵸 8년(1603) 2월, 이에야스는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상징하는 정이 대장군의 관직을 획득합니다. 여러 다이묘를 동원해 에도성의 보청을 실시하게 해, 에도 막부를 수립했습니다.
히데요리는 서서히 천하인의 흔적 자리에서 벗어나갑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아직 도요토미가는 재력 등을 포함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7월, 히데요시는, 생전의 히데요시의 계기로 약혼하고 있던 에도 막부 2대 장군이 되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치히메(어머니는 요도덴의 여동생인 오에)와 결혼. 사촌끼리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히데요리의 성장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응 변화

도요토미가는, 섭관가의 가격으로 간주되고 있어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순조롭게 위층이나 관직의 승진을 거듭해 갔습니다. 실제로, 연두에는 교토의 공가들이 오사카성에 대거 하향해 히데요리에 참가, 또 가신에 대해서 독자적인 관위 서임권을 행사하는 등, 조정으로부터는 히데요시 생전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
무가의 세계에서도,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장군가 직참과 동등하게 서류에 기재되어 있어, 히데요리는 여전히 도쿠가와가와 일정한 대등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10년(1605) 4월, 히데요리가 우대신으로 승진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상경과 교토에서의 회견을 희망합니다. 히데요리에게는 회견할 의사가 있었다고도 합니다만, 결국은 어머니의 요도군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6남의 마츠다이라 타다테루를 오사카성에 파견. 마츠다이라 타다테루가 히데요리와 면회하고 있습니다.

게이쵸 16년(1611) 3월, 이에야스의 간섭에 의해 후양성천황이 양위하고, 후미오천황이 즉위합니다. 히데요리는 「치히메의 할아버지에게 인사한다」라는 명목으로, 카토 키요마사와 아사노 유키나가에게 지켜져 상경해, 교토 니조성에서 이에야스와 회견했습니다.

호히로지 종명 사건과 도쿠가와 막부의 대응

게이쵸 19년(1614), 도요토미가가 재건하던 교토의 히로지 대불전은 거의 완성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