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유키(1/2)사나다가를 지킨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유키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사나다 노부유키(1566년~1658년)
출생지
나가노현
관련 성
우에다성

우에다성

누마타성

누마타성

마쓰시로 성

마쓰시로 성

관련 사건

무로마치 시대 후기, 전국 시대라고도 불린 전란의 세상은 도쿠가와가에 의해 종말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긴 도요토미가를 오사카성의 싸움으로 쓰러뜨립니다. 이 오사카성의 싸움에서 이에야스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사나다 노부시게(유키무라)였습니다. 그 노부시게의 오빠, 사나다 노부유키는 도쿠가와가에 다해, 메이지까지 계속되는 사나다가의 기초를 구축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사나다 노부유키를 설명합니다.

출생에서 전복으로

사나다 노부유키는, 나가로쿠 9년(1566년)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으로서 태어났습니다.
사나다가는 시나노쿠니 오현군(현재의 나가노현 오현군)의 카미노씨로부터 나뉘어 흥미로운 가계입니다. 신노의 할아버지, 사나다 유키타카의 무렵부터 카이(현재의 야마나시현)와 시나노(현재의 나가노현)를 영위하고 있던 다케다 신겐을 섬깁니다.

아버지 마사유키는 유키 타카의 3남이었기 때문에 무토가에 입양했다. 그런데 텐쇼 3년(1575년), 신겐의 아이, 타케다 카츠요리와 오다 노부나가가 싸운 나가시노의 싸움에 의해, 섬기고 있던 타케다가가 참패, 마사유키의 형들은 전사한 것으로부터 사나다 성에 복성해 집을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사나다가에 복성한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으로서 노부유키는 태어났습니다. 노부유키는 어린 시절 다케다가의 인질로 보냅니다.
텐쇼 7년(1579년)에 타케다 카츠요리의 嫡男・시부카츠의 전복과 동시에 전복을 허락받아 다케다 신겐의 1자를 받고 시부유키라고 자칭했다고 했습니다.

다케다가 멸망 후

텐쇼 10년(1582년) 3월, 긴키를 중심으로 패권을 추진하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는, 시나노국, 카이국의 다케다 정벌을 실시합니다. 사나다 마사유키가 섬기고 있던 타케다 카츠요리는 아마메산에서 자해해 다케다가는 멸망되었습니다.

당시 다케다가의 인질이었던 사나다 노부유키는 우에다성에 있는 아버지 마사유키 아래로 탈출합니다.
그런데 다케다가를 잃은 오다 노부나가도 같은 해에 혼노지에서 가신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토벌되어 자해합니다.
이때 시나노국, 카이쿠니는 오다가의 영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의해 시나노국, 카이국에서 오다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납니다(텐쇼 임오의 난).
그 흐트러진 시나노국, 카이국에 동쪽에서 침공해 온 것이 관동의 호조씨 직이었습니다. 사나다가는 이 호조가에 대해 신종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같은 시기에, 에치고국(현재의 니가타현)을 영위하는 우에스기 경승도 북쪽에서 시나노국으로 진출해 옵니다.
호조가에 신종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던 사나다가는, 신노가 중심이 되어 우에스기령의 카이즈성을 교란합니다.
그런데 남쪽에서 도카이도를 영위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시나노국, 카이국에 침공해 옵니다. 많은 구 다케다 가신이 도쿠가와가에 붙어 삼촌의 사나다 노부유키 등의 초대도 있었던 것으로, 누마타성을 호조방으로부터 탈환하고 사나다가도 도쿠가와가에 대해 호조씨와 적대하게 됩니다.
신노는 수세 800기를 이끌고, 호조가의 병사 5,000이 방어하는 테시마루성을 불과 하루에 탈환해, 무공을 꼽았다고 합니다.
요다 신쇼 등의 게릴라전도 공을 연주해 사나다가는 호조방을 누마타 지역에서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텐쇼 12년(1584), 사나다가는 시나노쿠니 코현군도 책략에 의해 지배하에 둡니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나가노현의 동부(히가시노부 지방)에서 군마현 북부에 걸쳐서 영주하게 되었습니다.

도쿠가와가와의 확집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나다가는 다케다가 멸망 후 도쿠가와가에 따릅니다.
그런데 텐쇼 13년(1585), 도쿠가와가와 호조가가 동맹을 맺자 도쿠가와가는 사나다가의 영지 일부를 호조가에게 양도하기로 했습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가와 단교하고 우에스기 씨에 신종합니다.
이것이 원인에 의해 마사유키는 도쿠가와가와 싸우게 됩니다(제1차 우에다 합전). 노부유키는 시성의 토이시성에 병사 300여명으로 들어가자 게릴라전을 이용해 도쿠가와가를 흐트러뜨렸습니다.

그 후 마사유키는 우에스기 경승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고, 텐쇼 17년(1589년)에는 이에야스와도 화목이 성립합니다. 사나다가는 도쿠가와가의 여력 다이묘가 되었습니다.
노부유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이에야스는, 중신의 혼다 타다카츠의 딸 고마츠 히메를 이에야스의 양녀로 한 후, 혼인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사나다가 중에서도 노부유키는 도쿠가와가에 가까운 존재가 됩니다.
텐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조가 토벌이 행해지면, 전후에 누마타령이 사나다가의 소령으로서 확정합니다. 노부유키는 누마타 성주가 되었습니다.

분로쿠 3년(1594년)에는 종고위 아래 이즈모리에 서임되어, 그 후 종사위 아래로 승서하고, 사무종을 본관으로 이즈모리를 겸임하게 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쵸 3년(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히데요시의 사후, 조정에서 최고위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게이쵸 5년(1600년), 실각하고 있던 오봉행의 이시다 미츠나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거병합니다(세키가하라의 싸움).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와 남동생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는 미츠나리 등의 서군에 붙었습니다. 노부시게는 이시다 미츠나리의 군에 참가한 오타니 요시히토의 딸을 아내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가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의 딸로, 이에야스의 양녀가 된 후 아내가 된 고마츠 히메를 아내로 하는 노부유키는, 이에야스 등의 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합니다.

사나다 노부유키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