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인(북정소·네네)(1/2)알몸 일관의 천하인을 지지한 아내

고다이인(북정소·네네)

고다이인(북정소·네네)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고다이인(북정소·네네)(1549년~1624년)
출생지
아이치현
관련 성
오사카성

오사카성

무로마치 시대 후기, 일본 각지가 거친 전국으로 불린 시대. 그 전국 시대에 알몸 일관으로부터 몸을 흥해 천하를 통일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고, 무사라고도 할 수 없는 소품으로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오다가의 유력한 무장, 한층 더 천하인으로 달려 갑니다. 이 히데요시를 지지한 것이 아내였던 고다이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한 아내, 고다이인을 소개해 가고 싶습니다.

「네네」와 「북정소」와 「고다이인」

후년,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이 되는 고다이인.
고다이인은 최초로 「네네」 「오네」 「네이」라고 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히데요시가 천하인 취해 관백에 맡겨지면 「네네」는 「북정소」라고 불리게 됩니다. 북정소란 헤이안 시대 초기, 귀족의 정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중기가 되면 격식화하고 선지를 가지고 섭정 또는 관백의 정실만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북정소란 섭정관백의 아내를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네네」가 「북정소」라고 불리게 되면 역사상에서는 특히 유명해져 북정소=네네, 로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에도시대 이후는 북정소를 섭정관백의 아내, 또 「네네」개인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한층 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낙식해 수녀가 되면 조정으로부터 원호를 받고, 처음 고다이인 쾌양심 아마, 나중에 다시 고다이인 호즈키 신자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북정소」는 「고다이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네네」 「북정소」 「고다이인」이라고 불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이 이야기에서는 「고다이인」으로서 진행해 갑니다.

출생부터 아사노가 양녀로

고다이인은 스기하라 정리, 아사히덴(이름을 「코히」라고도 함)과의 사이에 오와리 국 아사히무라(현재의 아이치현 기요스시)에서 태어납니다.
형제에는 키노시타 가정, 나가세이인(의사의 삼절 전우의 방), 스기하라 쿠마(아사노 나가 마사마사실)가 있습니다. 스기하라 쿠마가 아내 아사노 나가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신이 되어 도요토미 정권의 정권 운영에 참가, 오봉행의 1명이 되었습니다. 이 나가마사와 쿠마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가 키이 아사노가 초대 번주인 아사노 유키나가(장남), 기이국에서 아키쿠니로 전봉된 후의 아키 아사노가 초대 번주인 아사노 나가토시(차남) ), 아이(아사노 나가 나오)가 충신장의 무대가 되는 아카호 아사노가 초대 번주가 되는 아사노 나가시게(삼남)였습니다.

고다이인이 태어난 스기하라가, 더욱 인사의 아사노가는 도요토미가와 연결되어 큰 집이 됩니다.
타카다이인은 스기하라가에 태어났습니다만, 성장하면 어머니(아사히덴)의 여동생(이모의 후쿠)이 아내였던 아사노 나가카츠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일설에는 족경이었던 기노시타 후지요시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고다이인은 부부가 됩니다만, 어머니의 아사히덴은 이 결혼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곤란한 후지요시로는 친족이었던 아사노 나가카츠에게 부탁해 고다이인을 양녀로 받아, 드디어 결혼할 수 있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히데요시와의 혼인

에이로쿠 4년(1561) 8월, 고다이인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기노시타 후지요시로(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시집습니다. 당시로서 드문 자유 연애이며 남편의 신분이 낮기 때문에 질소한 결혼식이었다고 합니다. 연애로 묶인 두 사람은,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후에도 여러 다이묘 앞에서 오와리 부끄러움의 부부 싸움을 하는 등 종생 나카야 마지했다고 합니다.

또 전국 시대까지 주부권을 가진 정실이 가정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고다이인도 나중에 키노시타가(후의 하 시바가, 도요토미가)의 가내를 떼어 갑니다. 역시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후, 고다이인은 상경해 온 모리키모토에게 엄청난 술집을 보내는 등 강인한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와리의 오다가를 섬기는 히데요시에 며느리한 고다이인은 청주에 살고 있었던 시대, 마에다 토시야의 아내가 되는 요하츠인(마츠)과 친해, 이가와 마츠와의 중인도 했다고 합니다. 도사(현재의 고치현)의 번주가 되는 야마우치 이치토요의 아내 미성원(치요)과도 친하게 만년, 고다이인이 살고 있던 교토의 고다이지 근처에 미성원도 살고 있습니다. 고다이인과 나중에 오와리 출신으로 다이묘가 되는 무장의 아내들은, 이 무렵에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남편의 출세와 바람둥이

에이로쿠 11년(1568년)경부터 오다 노부나가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해 상경합니다. 남편의 키노시타 후지요시로(도요토미 히데요시)도 노부나가에 따라 카미에. 그런데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妾을 잡고, 히데요시의 첫 아이로 여겨지는 이시마츠마루(하 시바 히데카츠, 어릴 때 어절)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편의 바람기 버릇에 손을 굽은 고다이인은,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에게 편지를 내고 노부나가도 「텐시타 후타케」의 표시를 밀어낸 공문서로서 위로의 반환을 내는 등 남편의 바람에 고민당하고 네.

텐쇼 2년(1574년), 오미 쿠니나가하마성의 주가 된 히데요시는, 생모의 대정소(나카)나 고다이인을 불러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에서 키타오미(시가현 북부)로 이사 합니다. 고다이인은 각지에 원정해 나가하마를 비우는 경우가 많은 남편을 대신해 성주 대행과 같은 입장에서 가정을 다듬었습니다. 또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는 고다이인은 남편의 친족의 아이 등을 적극적으로 기르고 기릅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가토 기요마사이며, 후쿠시마 마사노리였습니다.

혼노지의 변에서 천하인의 아내로

이렇게 차분히 오다가 안에서 지위를 높인 남편인 키노시타 후지요시로(도요토미 히데요시), 그 후지요시로를 지지하는 고다이인.
그런데 텐쇼 10년(1582)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토벌됩니다(혼노지의 이상). 이때 고다이인은 나가하마성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케치 쪽에 붙은 야마모토 야마시로 성주의 아폐 정정이 나가하마성에 공격하여 점령합니다. 고다이인은 다이요시지로 대피하여 어려움을 피했습니다.

여기에서 하 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의 원인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오다가의 정쟁을 이겨냅니다. 또한 주변의 다이묘도 산하에 넣어 천하인으로 달려갔습니다.

텐쇼 13년(1585), 히데요시는 조정보다 관백에 서임됩니다. 이에 따라 고다이인도 종삼위에 서서 북정소의 칭호를 허락받습니다. 천하인의 아내가 된 고다이인은 조정과의 절충이나 다이묘의 처자의 교제를 실시해, 도요토미 가내의 가내를 떼어 놓습니다.

텐쇼 16년(1588) 후 양성천황이 준락제에 행행하자, 준비를 갖추어 수행한 고대원은 종일위라는 파격의 고위로 임명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무렵, 히데요시에서는 평야장 등 1만석의 소령을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다가의 아시가루의 아내로부터 나가하마 성주, 한층 더 천하인의 아내가 되어 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지한 고다이인. 타카다이인은 단지 가내를 나누는 아내로서는 아니고, 천하의 차배를 다루는 행정관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텐쇼 18년(1590)부터 시작된 오다와라 원정에서 히데요시는 칸토에서, 고다이인과 그 주위에 있는 여방에 5통, 요도덴에 1통, 츠루마츠(히데요시와 요도군 사이에 생긴 최초의 아이)에 1통, 다이쇼쇼소(히데요시의 어머니)에 1통, 요시카와 히로가에 1통의 편지를 내고 있어, 이 편지의 양으로부터 히데요시는 고다이인을 기내의 유수를 맡는 통괄자의 1명으로서 보고 있다 일을 듣습니다.
또 분로쿠 2년(1593)부터 행해진 조선의 역에서는 기내에서 전선이 되는 규슈 나고야에의 보급 물자나 교통의 원활화를 도모해, 도요토미 히데지와 함께 주인장의 발급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고다이인과 요도군

고다이인은 그 평생에 아이를 마련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거기서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는 측실을 많이 마련합니다, 그 1명이 요도군이었습니다. 요도군은 아버지를 아사이 나가마사, 어머니를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시의 딸로서 태어납니다. 요도군은 히데요시와의 사이에 쓰루마츠, 한층 더 쓰루마츠가 죽으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마련했습니다. 고다이인은 이 요도군과 오랫동안 대립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라고 하는 것도 타카다이인은 오와리국 출신으로 카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측에서 키웠습니다. 이 청정이나 정칙 등은 오와리국 출신의 다이묘를 중심으로 한 그룹을 구축(토요토미가) 무단파라고 불립니다. 요도군은 먼저 말했습니다만 오미국 출신입니다. 그리고 도요토미가에서도 오미국 출신의 다이묘의 이시다 미츠나리 등이 중심이 된 (토요토미가) 문지파를 구축해, 요도군은 그 중심으로 목격되었습니다. 거기서 오와리 무단파의 고다이인과 오미 문지파의 요도군도 대립하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있어서 양자는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있어, 고다이인은 죽은 남편의 불사에 전념해, 요도군은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역할을 나누고 있었다고 보여지고 있습니다. 고다이인과 요도군은 각각의 입장에서 도요토미가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죽음

게이쵸 3년(1598)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남편의 히데요시가 돌아가자 고다이인은 요도군과 제휴하여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과 도요토미가의 가내를 나누었습니다.

고다이인(북정소·네네)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