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성 전투 (1/2)「미키의 건살」이라고 불린 농성전

미키성 전투

미키성 전투

기사 카테고리
사건부
사건명
미키성 전투(1578년~1580년)
위치
효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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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생명에 의해, 모리씨의 세력하에 있는 중국 지방을 공격한 「중국 공격」. 텐쇼 10년(1582년) 6월의 혼노지의 이상으로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 중국공격 속에서, 히데요시는 병량공격을 구사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 중 하나가 텐쇼 6년(1578년) 3월 29일부터 텐쇼 8년(1580년) 1월 17일에 걸쳐 미키성을 공격한 「미키의 건살」이라고 불리는 싸움이겠지요. 오카야마현·비나카 타카마쓰성을 공격한 “다카마쓰의 물공격”, 돗토리현·돗토리성의 “돗토리성의 갈증(가마) 죽이기”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3대성 공격으로 알려진 싸움은 어떤 것 이었습니까?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에게 중국 공격을 명령한다

미키성의 싸움을 설명하기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국 공격」에 대해 간단히 잡아 둡시다. 원래 왜 오다 노부나가는 중국 공격을 히데요시에게 명령한 것인가. 노부나가와 중국 지방(산요도·산음도)을 다스리는 모리씨의 관계는 모리 모토나리의 시대는 우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토가메 2년(1571년) 6월에 모토나리는 사망. 흔적을 이은 모리키모토와의 관계는 당초는 우호적인 것으로, 양자는 군사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만, 서서히 관계가 악화해 갑니다.

그 원인이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모리씨를 의지해 망명해 온 것이었습니다. 휘원은 한번 눈은 요시아키와 노부나가의 사이를 잡는 것으로 노부나가와 적대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비젠국(오카야마현 남동부나 효고현의 일부 등)이나 하리마국(효고현 서남부)을 둘러싸고 노부나가와 조금씩 싸우게 됩니다. 거기서 다시 요시아키가 모리씨를 의지해 오면, 테루모토는 이번에는 노부나가와 적대하기로 결정, 요시아키를 비호합니다. 요시아키는 텐쇼 4년(1576년) 2월에 비고국의 도모(모두,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거점을 두고, 망명 정권하에서 반신장 체제를 구축해 가게 됩니다. 덧붙여서 이 시대의 막부는 지명에 덧붙여 「토모 막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이시야마 혼간지가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파기하고 다시 거병합니다(텐노지 합전). 모리 씨는 이때 이시야마 혼간지를 지원해, 제1차 기즈가와구치의 싸움 오다방의 수군을 깨고 혼간지에 병량 등을 전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와의 대립은 격화해 가게 됩니다. 그리고 텐쇼 5년(1577년)에는 모리씨는 하리마국에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스타트. 이에 대해 노부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모리씨의 본거지인 중국공격을 명한 것입니다.

미키성 전투 전야 : 벳쇼 장지의 이반

이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공격을 개시하고, 텐쇼 5년 10월에는 하리마국을 평정하기 위해 하리마에 들어가, 쿠로다 간베에의 히메지산성을 본거지에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하리마는 오다·모리씨 양쪽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 많은 세력이 오다쪽에 붙습니다. 그 중 큰 세력이 하리마 수호인 아카마츠 씨의 흐름을 끄는 명문 벳쇼씨로 동 하리마 일대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벳쇼씨의 당주는 벳쇼장지. 모토가메 원년(1570년)에 가독을 이은 후, 텐쇼 3년(1573년)에는 노부나가에게 속견하고, 그 후 기슈 정벌에 가세하는 등, 이전부터 노부나가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12월에는 모리 쪽에 붙은 아카마츠 마사노리의 우에즈키성(효고현 사용군 사용초) 등을 떨어뜨려 하리마를 거의 거의 평정합니다. 이 시점에서 나가하루는 히데요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만, 텐쇼 6년(1577년) 2월, 무려 이반해 모리방에 대해서 버리는 것입니다.

나가하루가 배신한 이유는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후세의 군기 이야기 '별소 장지기'에 의하면, 히데요시가 카코가와성에서, 대모리를 위한 전략 회의(가코가와 평정)를 실시했을 때의 사건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회의에는 장지의 대리로서 삼촌의 벳쇼 요시부모, 가신의 미야케 치타다가 출석. 미야케 다치타다는 전술을 제안했습니다만 히데요시는 완전히 무시해, 벳쇼씨 측에 불만이 남은 것이 이반의 이유가 되었다고 하는 것. 덧붙여서, 이때 벳쇼 씨 측이 위에서 시선이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불흥을 샀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하는 설이나, 요시부모가 나가지에 대해, 「히데요시에 자유롭게 움직이면 벳쇼 씨에게 재앙을 초래한다고 칭찬했다는 설, 원래 하리마의 명문이었던 벳쇼씨가 아시가루 출신에 불과한 히데요시를 따르는 것을 싫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우에즈키 성의 싸움이 배신의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싸움 때, 히데요시는 아카마츠 정범의 항복의 제의를 거부하고, 총 공격을 걸어 성병을 죽이고, 아이 박쥐 찌르기에, 여성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모리씨를 견제해, 어느 쪽도 없는 태도 그대로의 하리마 국중에게의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고 합니다만, 이 가고가와의 싸움에 있어서의 잔인한 행동에 싫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 이 밖에 하리마에 정토진종의 문도가 많았던 것, 벳쇼씨 내부의 권력투쟁의 영향, 원래 교류가 있던 모리측에서 노부나가를 배신하라는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던 것 등도 원인이었던 것 같고,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으로부터, 벳쇼씨는 모리방에 붙게 된 것 같습니다.

벳쇼 씨가 모리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벳쇼 씨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히가시 하리마 지역의 제세력도 이것에 동조해, 하리마의 정세는 굉장히 냄새가 되어 왔습니다. 당연히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벳쇼씨 토벌을 명령합니다. 한편 장지는 본거지인 미키성에 농성하여 모리씨의 원군을 기다리기로. 이렇게 해서 미키성의 싸움이 시작되게 되는 것입니다.

미키성의 싸움 ①농성전의 스타트

벳쇼장지를 비롯한 벳쇼씨의 본거지 미키성에는, 전투에 대비해 히가시하리마의 병사나 그 가족, 정토진종의 문도 등 영민이 모였습니다. 이른바 영민마다 세우는 「모리고리(모로고모리)」였기 때문에, 그 수는 약 7500명에 이르렀습니다. 굳이 농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량이 필요하지만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오다 쪽의 책략으로, 영민들을 위협했기 때문에 상당한 어른수가 되었다고.

이 때문에, 나가하루는 모리 씨에게 협력을 요구해, 모리 씨의 본거지나, 노부나가와 적대하고 있던 에가 성(효고현 히메지시)의 하리마 미키 씨 당주·미키 도오리 가을로부터 원군이나 병량을 보내 준다 일. 병량은 해상 수송되어 해안의 고사성이나 어주성에서 육양된 후, 다른 곳의 지성과 연계하면서 카코가와나 산길을 통해 성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병량 수송 루트조차 지키면 농성은 계속됩니다.

원래 미키성은 미낭강에 인접한 대지에 세워진 성으로, 북·동·서의 삼방을 절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방어를 굳히기 위해 타카오야마성과 미야노상 요해가 배치되어 있어 공격하기 어려운 성입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미키성을 공격하기 위해, 지성으로부터 공략을 개시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텐쇼 6년(1577년) 3월 29일에는 미키성을 포위해, 지성의 하나인 노구치성을 떨어뜨렸습니다. 미키성 전투의 시작입니다.

한편의 모리카타는 코바야카와 타카케이·요시카와 모토하루 등이 가미츠키성 탈환을 목표로 3만 병을 이끌고 출진했습니다. 우에즈키성은 하리마·미작·비젠의 국경에 있는 성으로, 오다 VS모리의 전선에 있어서는 중요한 거점. 빨리 되돌리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에즈키성에 원군으로 가려고 합니다. 노부나가도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한 원군을 냈습니다만, 원군은 미키성의 서쪽에 있는 카미요시성, 시호성, 타카사성 등의 지성을 포위했습니다. 우에즈키성을 돕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키성 공략에 중점을 둔 것입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에게 우에즈키성을 돕도록 진언합니다만, 노부나가는 미키성 공략의 우선과 각 지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합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우에즈키성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에즈키성은 오다카타의 아마코 카츠히사 등이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카츠히사는 7월에 성병의 조명을 조건으로 모리쪽으로 항복·자칼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아마코씨는 멸망했습니다.

미키성의 싸움 ② 병량 공격의 도중에 아라키무라 시게가 모반

우에즈키성의 전투 후, 오다카타의 원군은 카미요시성, 시호성, 타카사성을 공략해 철퇴합니다. 이렇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미키성의 공략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명군사·다케나카 반베에가 진언했다고 하는 것이, 병량공격입니다. 공격하기 어려운 미키성을 떨어뜨리려면 주변의 지성에서 떨어뜨려 미키성을 고립시키는 작전이었습니다.

미키성 전투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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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리모토 나오코
작성자(라이터)전 여행 업계 잡지의 기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사·세계사 불문하고 역사를 정말 좋아한다. 평상시부터 사찰 불각, 특히 신사 순회를 즐기고 있으며, 역사상의 인물을 테마로 한 「성지 순례」를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은 이시다 미츠나리, 좋아하는 성은 구마모토성, 좋아하는 성터는 하기성. 전쟁 성터와 성터의 이시가키를 보면 마음이 설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