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씨야스 (2/2)사가미의 사자

호조 씨야스

호조 씨야스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조씨 야스시(1515년~1571년)
출생지
가나가와현
관련 성
오다와라성

오다와라성

천문 19년(1550)부터 관동 관령의 야마우치 우에스기가 공략을 개시합니다.
천문 21년(1552년)이 되면 지지할 수 없게 된 우에스기 헌실은 나가오 경호의 지원을 얻기 위해, 무사시국 북부(현재의 사이타마현)까지 물러났습니다. 한층 더 시모노국(현재의 토치기현), 보소반도(현재의 지바현)에도 진출 차분히 동쪽으로 확대해 갑니다.

그런데 호조가가 거점을 두는 오다와라. 오다와라의 서쪽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쪽에 위치한 이마가와가와는 가와고에 야전 직전, 화목을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호조 씨야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와는 서로 의심 암귀에 빠져 침착하지 않았습니다.
이 당시, 씨야스가 오다 노부히데(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반환에 「일화(和睦)」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나라(이마가와가)로부터의 의심이 멈추지 않기 때문에 폐를 끼쳤다. "라고 쓰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전기가 방문합니다. 천문 20년(1551) 무렵, 호조·다케다·이마가와가의 혼인 협상을 진행해, 인사로서 동맹 관계를 쌓는 조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 호조씨 야스의 딸과 이마가와 씨 마코토(이마가와 요시모토 장남)의 혼인을.
  •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과 다케다 요시노부(다케다 신겐 장남)의 혼인을.
  • 다케다 신겐의 딸과 호조씨 마사(호조씨 강장남)의 혼인을.

호조, 이마가와, 다케다는 서로 혼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동맹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서쪽의 위협이 없어지고, 또한 동맹 관계가 된 타케다가와의 협력도있어 호조 씨야스는 관동 공략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에스기 켄신의 침공

호조가의 서쪽, 스루가의 이마가와가나 카이의 다케다가와 삼국동맹으로 굳힌 호조씨야스.
그런데 다시 서쪽 관동에서 사태가 진전됩니다. 관동관령의 우에스기 헌실이 에치고국(현재 니가타현)에 나가오 경호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나가오 경호를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로 한 후의 우에스기 켄신입니다.

호조씨 야스시는 에이로쿠 2년(1559), 아들의 호조씨 마사에 가독을 양도해 은거했습니다. 이것은 「에이로쿠의 기근」이라고 하는 대기근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체에 의한 덕정령의 실시를 목적으로 한 때문입니다. 관동은 기근에 의해 싸움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에이로쿠 3년(1560) 우에스기 경호는 우에스기 헌실을 옹고 관동에 진출합니다. 에치고국에서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에 들어가면 차례차례 호조의 성을 떨어뜨렸습니다. 우에스기 가문 아래에 잇달아 관동의 다이묘, 국인, 혹은 관동 밖의 사타케가 등이 호조 토벌에 모여 옵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4년(1561) 3월, 최종적으로 10만여개까지 부풀어 오른 우에스기 경호가 이끄는 연합군은 호조씨 야스가 있는 사가미에까지 밀려 오다와라성을 포위합니다. 그러나 오다와라성의 방위는 단단하고, 영록의 기근 이후에도 속발하고 있던 기근을 위해 장기간에 걸친 공성을 유지할 수 없어 연합군은 해체해 갑니다.

또한 씨야스와 동맹을 맺는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 쿠니가와 나카지마에 카이즈성을 완성시켜 에치고국에의 침공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본국의 위기를 느낀 나가오 경호도 오다와라성에서 철퇴, 가마쿠라 쓰루오카 하치만구에서 우에스기 헌실로부터 관동관 영직을 양도받은 우에스기 경호(우에스기 켄신)입니다. 이 직후, 우에스기 경호는 시나노국에 진출한 다케다 신겐과 가와나카지마에서 싸우게 됩니다, 제4차 가와나카지마의 합전입니다.

삼국 동맹의 붕괴와 타케다 신겐과의 싸움, 그리고 그 마지막

그런데 나가오 경호(우에스기 켄신)에 의해 침공을 받은 호죠 씨야스. 씨야스가 관동에서 사투를 연기하고 있는 같은 시기,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에서도 하나의 싸움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오와리국을 진행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토벌된 싸움입니다. 이에 따라 호조가, 이마가와가, 다케다가에서 맺은 삼국동맹도 바뀝니다.

에이로쿠 11년(1568),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죽은 이마가와가는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거기서 종래의 외교 방침을 전환시킨 타케다 신겐이 이마가와가에 침공했습니다. 여기에 삼국 동맹은 종말합니다.
호조씨 야스시는 아가미의 이마가와씨 마코토로부터 지원을 요구받아 호조씨정이 다케다가와 대치합니다.

그런데 씨야스는 뒤에서 이마가와가에 침공하고 있던 미카와국(현재의 아이치현 동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도 밀약을 맺고, 이마가와가가 없어진 후의 손도 쳤습니다. 호조가는 다케다가를 물리치고 히가시 스루가를 탈취합니다.

호조가는 적극적인 방침으로 전환했지만, 동시에 다케다가와 우에스기가, 간토의 반호쿠조 세력을 적에게 돌렸습니다. 거기서 숙적이었던 우에스기 가와 에이로쿠 12년(1569), 우에스기 켄신과 호조씨 야스시와는 에치상 동맹을 맺습니다. 이렇게 호조가는 다케다가와의 싸움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호조가는 흔들리지 않고 스루가국에서의 전투는 다케다에 밀렸습니다.
호조씨 야스의 생애는 바로 카이의 다케다 신겐,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과의 사투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싸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호조 씨야스는 모토가메 원년(1570) 여름 무렵부터 중풍(뇌척혈)의 증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토가메 2년 10월 3일, 씨야스는 오다와라성에서 사망했습니다, 향년 57. 유해는 가네유산 사쿠모지 절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

내정가로서 호조 씨야스

호조 씨야스가 가독을 이어받은 당시 일본 전국에서는 천재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천문 8년(1539)에 발생한 폭우, 홍수에 더하여 메뚜기의 해도 나온 것으로부터 기근이 태어납니다. 다음 해에도 폭우, 홍수가 발생한 것으로부터 역병도 유행해 전국 규모의 천재가 되었습니다, 천문의 기근(텐부노키킨)입니다.

천문 18년(1549). 관동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피해를 입은 영민에 대한 대응이 후반에 돌고, 영국 전역에서 마을이나 타바타를 포기해 대규모 도산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호조 씨야스는 주위의 다이묘나 국인과 싸우기 전에 자신의 영국 경영을 안정화시켜야 했습니다. 거기서 필요한 때에 임시에 징수해 온 보역을 그만두고, 세제 개혁을 실시합니다. 화폐의 질에 편차가 있었던 것으로부터 화폐 제도를 개혁했습니다.

중심 도시의 오다와라에 전국에서 장인을 불러 도시 개혁을 실시해 그 결과, 오다와라 하야카와 상수라고 불리는 상수도의 정비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씨야스는 검지를 철저히 하고, 군역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등 내정 기반을 정돈하는 것으로 대외적인 저항력을 붙이려고 부심했습니다.

호조가와 오다와라성의 발전

(후) 호조가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전국기에만 존재한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호조가의 조, 이세 신구로(호조 사쿠모)는 무로마치 막부의 신고, 혹은 봉공중으로서 누나의 아내인 이마가와가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이즈쿠니에 가까운 흥국사성(현 누마즈시)을 이마가와가에서 얻었습니다. 그 후, 동쪽에 위치하는 호리코시 공방을 습격해(하야구모의 호리코시 공방 습격 사건도 무로마치 막부로부터의 지시라고도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즈국에 세력을 늘립니다. 이세 신구로는 흥국사성에서 니야마성에 거점을 옮깁니다.

그리고 오모리씨를 쓰러뜨려 오다와라성을 얻었습니다. 2대째의 호조씨 줄다리는 야마야마성에서 오다와라성으로 거점을 옮깁니다.
3대째의 호조 씨야스는 오다와라성을 거점이 되는 도시에 정비했습니다. 그 성과가 위에서 언급한 오다와라 하야카와 상수입니다. 하야카와 상수는 하야카와에서 취수하여 음료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의 연가사 무네마키가 천문 14년(1545)에 오다와라에 들렀을 때, 하야카와 상수는 이미 있었던 것 같고 「동국 기행」중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하야카와 상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상수 시설이었습니다.

이처럼 호죠 씨야스는 주위와 싸울 만큼의 다이묘가 아니고, 민생에게도 힘을 넣은 위대한 다이묘였습니다.

호조씨 야스시의 기사를 다시 읽는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