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헌정 (1/2)관동 관령

우에스기 헌정

우에스기 헌정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우에스기 헌정(1523년~1579년)
출생지
군마현
관련 성
미노와 성

미노와 성

관련 사건

전국 시대, 카이의 다케다 신겐이나 이즈의 호조 씨야스에 농락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관동 관령의 우에스기 헌정입니다. 우에스기 헌정은 관동을 통하는 가마쿠라 공방의 보좌, 관동 관령에 취임했지만 주위의 다이묘에 밀려 간토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치고의 나가오 경호(우에스기 겐신)에 조력을 청해, 최종적으로 나가오 경호에 우에스기의 명적을 건네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관동, 고신에쓰의 다이묘들에게 농락된 관동 관령 카미스기 헌정에 대해 봅니다.

우에스기야란?

우에스기 헌정을 낸 우에스기 가.
우에스기가의 흥은 헤이안 시대의 끝, 후지와라 키타가의 일문으로 태어난 후지와라 기요보의 차남, 시게보에서 시작됩니다. 시게보는 탄바국 무사카군 우에스기쇼(현재의 교토부 아야베시 우에스기초 부근)를 받은 것으로부터 후지와라 성으로부터 우에스기 성을 사용하게 되어 우에스기 중방이라고 자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에스기 집의 시작입니다.

이 중방의 남자, 우에스기 요시시게의 딸 키요코는 아시카가 사다시씨에게 시집다. 그리고 아시카가 사다시씨, 키요코 사이에 태어난 것이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타카시씨였습니다. 즉 무로마치 막부를 연 아시카가 존씨와 우에스기가와는 친척끼리가 됩니다.

그런데 막부를 연 아시카가 존씨. 존씨는 관동을 통치하기 위해 가마쿠라에 가마쿠라부를 둡니다. 가마쿠라부의 장관(가마쿠라 공방, 혹은 가마쿠라전)에는 존씨의 4남 아시카가씨가 붙어 관동 10개국(사가미·무사시·안방·가미소·시모소·상륙·우에노·시모노·이즈·카이)를 다스리는 일 되었습니다.

이 가마쿠라 공방을 보좌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 우에스기 헌현(우에스기 요시시게의 손자, 아시카가 존씨의 모방의 종제)입니다. 교에서 장군을 보좌하고 정무를 다루는 관령에 준하여 가마쿠라 공방을 보좌하는 지위에 관동 관령을 두었습니다. 이 관동 관령에 우에스기 헌현이 일어나, 여기에서 우에스기가가 대대로 맡아 갑니다. 관동 관령으로 일해온 우에스기야. 우에스기가는 가마쿠라의 야마우치에 관을 세운 것으로부터 야마우치 우에스기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것에 대해 무로마치 시대 중기, 야마우치 우에스기에서 헤어지고 오타도 관에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한 것이 오기타니 우에스기입니다. 이 종가인 야마우치 우에스기와 오기야 우에스기는 수년간 항쟁을 반복합니다.

게다가 야마우치 우에스기야는 가마쿠라 공방과도 확집을 가졌습니다. 칸토는 야마우치 우에스기, 오기야 카미스기, 가마쿠라 공방의 3자에 의해 대립합니다. 그리고 우에스기 헌정은 종가인 야마우치 우에스기가에서 태어났습니다.

탄생과 관동 향록의 내란

대영 3년(1523), 우에스기 헌정은 관동 관령이었던 우에스기 헌방의 아들로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헌정 3세 때 아버지의 헌정은 죽어버렸습니다. 헌정은 어려서, 흔적을 이을 정도의 나이에도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헌정이 태어나기 전에 입양으로 맞이하고 있던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고기의 아이, 우에스기 헌관이 야마우치 우에스기의 가독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년 정도 지났을 무렵.

향록 4년(1531), 가마쿠라 공방(이 무렵은 후루카와 공방이라고 불립니다) 중에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우에스기 헌정은 가신들에게 옹립되어 당주인 우에스기 헌관에 반항했습니다. 결과, 우에스기 헌정이 야마우치 우에스기가의 가독과 관동 관령의 직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관동 향록의 내란)

우에스기 헌정과 주변 다이묘의 확집

그런데 관동관령이 된 우에스기 헌정은, 여기에서 강적과 대해 가게 됩니다. 처음은 간토의 서쪽에 위치한 카이의 수호 다이묘 다케다가입니다. 천문 10년(1541), 다케다가 당주 다케다 노부토라(다케다 신겐의 아버지)는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에 인접하는 시나노 코현군에 침공합니다. 고현군의 영주 카이노동강은 우에스기 헌정에 구원을 요구해, 헌정은 출병해 화목에 박혔습니다.

다음은 관동의 남쪽에 위치한 이즈국, 사가미국(현재의 가나가와현)의 후호조가입니다. 호조가는 종종 무사시국(현재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부근)에 진출하면 우에스기가의 군을 깨고 있습니다. 우에스기 헌정은 이 호조씨 강을 매우 위험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위기감이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천문 11년(1542)에 우에스기 헌정은 상륙국 가시마 신궁에 호조씨 토멸을 맹세하는 원문을 납부했습니다, 결의의 기원서입니다. 그리고 호조가를 배제할 계획이 진행됩니다.

가와고에 야전의 패배

우에스기 헌정의 두통의 씨였던 호조가. 그런데 호조가의 당주였던 호조 씨야스도 또, 사방에 적을 안고 있었습니다.

천문 14년(1545)의 일입니다. 호조 씨 야스시는 서쪽 이웃 나라, 이마가와 집과 영토 문제를 안고있었습니다. 이마가와가는 7월, 평화의 제안을 호조가에 내놓는데 미야스 야스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거기서 이마가와가는 우에스기 헌정과 모방 호조가를 동서로부터 끼워 격사하는 것을 획책합니다. 7월 하순, 이마가와가가 호조가에 대해 침공합니다. 이에 놀란 호죠 씨야스는 서쪽의 이마가와가와 대치하기 위해 군을 움직였습니다.

9월, 이번에는 호조가의 동쪽, 관동으로부터 우에스기 헌정이 침공합니다. 헌정은 이때, 원적이었던 오기타니 우에스기의 당주 우에스기 아침정과 관계를 수복해, 한층 더 호조 가까이였던 가마쿠라 공방(후루카와 공방) 아시카가 하루 씨를 안아줬습니다. 가마쿠라 공방, 관동 관령의 위광에 의해 주변의 다이묘, 국인이 우에스기 헌정들 아래에 모여 옵니다, 그 수 8만과 10만이라고도 말해졌습니다. 우에스기 헌정은 호조가의 가와고에성을 이 대군으로 포위합니다.

놀란 것은 호조 씨야스입니다.이대로는 동서에서 침공되어 한 덩어리도 없습니다. 씨야스는 카이국의 다케다가에게 중개를 의뢰하면 이마가와가에 영토를 할양해 강화에 반입했습니다. 호조가는 서쪽의 이마가와가와의 문제를 일단은 해결합니다. 천문 14년(1545)의 사이에 이마가와가에서 병사를 끌어올려 일단은 오다와라로 귀진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흐르면서 씨야스는 8천의 병사로 둘러싸여 있는 가와고에성에 구원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가와고에 성은 수만 명의 병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 우에스기 헌정과 아시카가 하루도 대군이라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천문 15년(1546) 4월, 호조씨 야스는 강화를 우에스기 헌정에 요구했습니다. 토론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나중에는 체결만 하면 강화가 성립된다는 직전의 밤. 호조가는 우에스기의 본진에 야습을 겁니다. 이 가파른 습격에 우에스기 측은 당황했고, 가와고에 성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는 푹 빠져 도망합니다. 우에스기 헌정도 목숨을 걸고 호조가의 병사로부터 도망쳐 거점인 우에노 쿠니히라이성으로 도망쳤습니다. (가와고에 야전) 이렇게 관동관령인 우에스기 헌정은 급속히 힘을 잃어 갑니다.

관동에서 탈출

호조씨 야스와 카와고에 야전에서 싸워 패한 우에스기 헌정. 히라이성에 방황했지만, 더욱 추격이 걸립니다. 천문 16년(1547), 시나노쿠니 사쿠군(현재의 나가노현 북부)의 싸움에 가담해 타케다 신겐에게 대패를 합니다. 이에 따라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과 관동의 다이묘, 국인이 이즈의 호조씨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관동관령인 우에스기 헌정은 몰려 갑니다.

천문 21년(1552), 무사시국(현재의 가나가와현)에 있는 미타카성이 낙성하면 헌정이 있는 히라이성도 호조군의 위협에 노출됩니다. 이것에는 헌정 주변의 가신도 당황해 호조가에 내려 버렸습니다. 헌정은 히라이성을 퇴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해 3월 히라이성은 낙성, 헌정은 그대로 에치고국의 나가오 경호(우에스기 겐신)의 허락으로 도망쳤던 것이었습니다.

에치고 입국과 관동 침공

호조가에 쫓겨 간토를 뒤로 한 우에스기 헌정은 에치고국에 들어가 나가오 경호(후의 우에스기 켄신)의 비호를 받습니다. 거기서 헌정은 나가오 경호랑을 우에스기가의 양자로 했습니다.

우에스기 헌정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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