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노부토라(1/2)카이의 호랑이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

다케다 노부토라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다케다 노부토라(1494년~1574년)
출생지
야마나시현
관련 성
겐카가사키관

겐카가사키관

고후성

고후성

전국시대, 카이쿠니(현재의 야마나시현)를 다스려 두려워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입니다. 다케다 신겐은 카이쿠니의 수호 다이묘, 다케다 노부토라의 적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신호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카이국을 정리해, 사가미나라의 호조가나 스루가국의 이마가와가와 싸웠습니다. 그런데 타케다 신겐은 그러한 신호를 카이국에서 추방하고 은거시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국 초기 다이묘, 다케다 노부토라를 보고 싶습니다.

카이쿠니의 다케다가

카이쿠니(현재의 야마나시현) 다케다씨. 전국 시대의 다케다 신겐이 유명하지만 다케다 씨 자체 오래된 무사의 가문이었습니다. 가와치국(현재의 오사카부 동부) 기요와 겐씨를 출자로 가진 다케다씨는 겐요미츠루를 조로 해, 카이국에 토착한 무사입니다.
카이 나라 이외에도 아키 쿠니 타케다 씨와 와카 사쿠니 타케다 씨 등 전국에 일족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카이 쿠니 타케다 씨는 겐토쿠 아침부터 카이 쿠니 수호직을 맡아 대대로 카이 쿠니를 통치하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 중기가 되면 힘이 쇠약해져 국인중이나 수호대인 터부씨의 대두를 용서합니다. 카이쿠니는 혼란에 흐트러지지 않고 월요일은 흘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다케다 노부토라는 카이쿠니에서 태어납니다.

신토라 탄생과 타케다가의 통일

무로마치 시대 중기, 카이쿠니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없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신토라의 할아버지 다케다 노부 마사는 수호로서 국내를 정리해 안정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창은 가독을 장남 다케다 노부나로에게 양도하고 은거합니다. 그런데 은거한 신창은 갑자기 차남의 신혜에게 가독을 양보할 의향을 보였습니다.
장남의 노부나미는 반발하고, 안정으로 향하고 있던 카이쿠니는 장남의 노부나와와 부 신창, 차남의 노부에의 두파로 나뉘어 이분합니다.

그런 가운데 다케다 노부토라는 메이코 3년(1494)(혹은 메이코 7년(1498) 모두) 다케다 노부나와의 능남으로 태어납니다. 카이 나라가 이분하고 싸우고 있던 도중에 태어난 신토라였지만 4세 무렵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명응의 대지진입니다. 아키타 7년(1498) 도카이도 앞바다를 진원으로 하는 대지진이 일어나 긴키에서 관동까지 쓰나미가 밀려들었습니다. 바다에 면하고 있지 않은 카이국도 피해는 크고, 신나와 신에의 형제는 싸움을 중단해 가독은 신나와가 이어졌습니다.

가독을 이어받은 노부나미였지만 영정 2년(1505), 카이국을 이분시킨 장본인으로 신토라의 할아버지인 다케다 노부 마사가 사망, 다음 해의 영정 4년(1507)에는 신토라의 아버지, 노부나와도 죽습니다.
카이국의 국수인 노부나가가 죽어 다케다가의 가독은 노부토라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반발한 것이, 죽은 노부나와와 싸우고 있던 노부에입니다. 신토라의 삼촌이기도 한 노부에가 이 가독 계승에 반발하여 노부토라와 노부에가 나뉘어 항쟁으로 발전했습니다.
항쟁은 싸움으로 발전해, 카이 나라를 이분한 전이 됩니다. 카츠야마성의 전투에서 노부에가타는 대패하고, 삼촌의 다케다 노부에를 시작해 노부에키의 국인중도 전사했습니다. 이것으로 다케다 노부토라는 다케다가를 정리합니다.

카이 나라의 통일

다케다 노부토라는 삼촌의 노부에를 패사시켜 다케다 가운데를 모아 올렸습니다만, 카이 나라에는 다케다가를 따르지 않는 국인중이 있었습니다. 신호는 이런 순종하지 않는 국인중을 공격해 멸망시키거나 혼인관계를 맺는 일로 순종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해 신토라에 적대하고 있던 국인중은 스루가국의 이마가와씨를 의지해 다케다가를 중심으로 한 카이쿠니와 이마가와가의 스루가국과는 긴장 관계가 되어 갑니다. 특히 카이쿠니의 서부를 영위하는 오이가는 이마가와가를 의지했고, 이마가와가도 카이쿠니에 개입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마가와가의 무릎 전, 스루가국의 국인중이 반란을 일으키는 태도를 보이면, 다케다가와 이마가와가는 화목합니다. 노부토라는 오이가와도 화목해, 그 화목의 증거로서 오이가로부터 아내를 불러가게 되었습니다. 이 오이가에서 온 공주, 오이 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다케다 하루노부, 후의 다케다 노부겐입니다.

차분히 카이국의 통일을 진행하고 있던 신토라는 거성을 바꾸고, 보다 통일을 견고한 것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때까지 카이쿠니의 정치의 중심지는 이시와칸(현재의 고후시 가와다마치, 휘후키시 이시와초 등)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신토라의 할아버지인 신창과 아버지인 신나와도 이시와칸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이쇼 15년(1518) 신토라는 수호소를 아이카와 선상지의 고후(고후시 고후 나카마치)로 이전. 성하를 정비해, 유력국인중들의 집도 이 고후성하에 모아 집주시켰습니다.
다케다 노부토라는 카이쿠니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주변 세력과의 대립

다케다 노부토라는 카이국을 안정화시키면 카이국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사가미국(현재의 카나가와현 서부)에 생긴 신흥 세력인 호조가와 대립. 호조가는 관동관령 우에스기 가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토라는 관동 관령 우에스기 가와 손을 잡았습니다.
반대로 사가미국의 호조가와 스루가국의 이마가와가와는 인사관계에 있었으므로 신토라는 이마가와가와도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층 더 시나노국(현재의 나가노현)에도 눈을 돌립니다. 국호는 카이국과 시나노국과의 국경에 침투해 스와가와 싸웁니다.

이렇게 카이국 주변과 싸우고 국호는 일진일퇴를 반복합니다. 카이 나라를 둘러싼 스와 가, 이마가와 가, 호조 가와 대립, 관동 관령 가미 스기 가와는 동맹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국호의 방침에 반발한 카이국의 국인중이 신호의 밑을 떠나는 등 상황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천문 4년(1535) 신토라는 스와가와 화목,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다음 천문 5년(1536)의 일입니다. 스루가국 이마가와가의 당주 이마가와씨 테루와 그 동생의 히코고로가 사망. 이마가와가에서는 당주 부재가 되어, 죽은 미츠키의 동생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이때는 젠토쿠지 승요)와 겐히로 탐사 사이에서 가독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쿠라의 난입니다.
이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대해, 대립하고 있던 신토라와 호조가가 지원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승리해 이마가와가의 당주가 되었습니다. 신토라는 당주가 된 요시모토에게 딸을 아내에게 내보내 다케다가와 이마가와가와는 동맹 관계가 되었습니다.
또 천문 8년(1539) 다케다가와 호조가는 화목합니다.
시노부는 대립하고 있던 나라와 서서히 안정적인 관계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시나노국의 진출을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케다 노부토라에는 嫡男가 있었다. 다케다 하루노부, 나중에 다케다 노부겐입니다. 신겐은 천문 4년(1535)에 원복, 천문 5년(1536)에는 시나노쿠니 사쿠군의 싸움으로 초진을 장식했습니다.
천문 10년에 노부토라는 적남의 신겐과 함께 시나노쿠니 사쿠군을 침공합니다. 침공 자체는 능숙하지 않았습니다만, 신토라도 신겐도 카이로 끌어올렸습니다. 카이로 끌어 올린 노부토라는 그 발로 스루가국의 아가씨,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만나러 갔습니다. 이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신토라 추방

천문 10년(1541) 6월, 다케다 노부토라가 시나노국에서 귀국해, 그 발로 딸사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만나기 위해 스루가로 향합니다. 그런데 이 신호의 유수를 노리고 아들의 다케다 신겐이 카이와 스루가와의 국경을 봉쇄했습니다. 신토라는 귀로가 없어져 보이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케다가의 악보 가신의 동의를 얻어, 신겐은 다케다가의 가독과 수호직을 상속, 신호는 은거 취급이 됩니다.

다케다 노부토라와 아들의 다케다 노부겐과는 휨이 맞지 않았습니다. 신호는 장남의 신겐보다 차남의 노부시게를 중용한 것이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 신토라와 다케다 가신단과도 휨이 맞지 않았습니다. 거듭되는 외정은 중세를 초래해 국내는 피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에서 다케다 신겐이나 가신들은 신호를 쫓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쫓겨난 신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서 신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전에 다케다 신겐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연락을 취해 강제적으로 신토라를 출가시키는 일로 합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토라의 은거료는 다케다 가문에서도 나오고 있으며, 이마가와 가문에서도 최촉의 서장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신토라 혼자 모르는 채 국주의 자리를 쫓기게 되었습니다.

추방 후 신호 호

다케다 신겐에 의해 카이쿠니를 추방된 다케다 노부토라는 잠시 동안 스루가국의 이마가와가에 몸을 옮겼습니다. 이 이마가와 집에있는 동안,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고치 덴"으로서 이마가와 씨 일문보다 높은 신분으로 대접되고 있습니다.
또 신토라도 이 무렵에 출가해, 「무인사이도 유」를 자칭 표 무대에서는 은거했습니다.

다케다 노부토라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