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카츠요리 (1/2)위대한 아버지 뒤에서 고생한 뛰어난 무장

다케다 카츠요리

다케다 카츠요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다케다 카츠요리(1546년~1582년)
출생지
야마나시현
관련 성
고후성

고후성

겐카가사키관

겐카가사키관

관련 사건

다케다 카츠요리(타케다 카츠요시)는, 전국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 카이·시나노국을 본거로 한 전국 다이묘입니다.
아버지는 다케다 신겐, 그 사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다케다가를 이어받은 후 위대한 아버지가 남긴 가신들의 통제에 고생했습니다. 주위에는,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나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유력한 다이묘와도 적대, 나가시노의 싸움으로 패배했습니다.
그런 비운의 무장이었던 다케다 카츠요리를 이번에는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케다 카츠요리의 탄생

다케다 카츠요리는 천문 15년(1546), 다케다 신겐의 4남으로 태어납니다.
어머니는 시나노국국 스와(현재의 나가노현 스와시 부근) 영주·스와 뢰중의 딸인 스와 어료인이었습니다. 카츠요리는 가마가사키관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란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머니의 친가였던 스와가는 아버지의 신겐과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만 손절(동맹 파기)이 되어, 신겐은 스와에 침공, 스와 일족은 멸망했습니다.
다케다가는 시나노 침공을 본격화해 에치고국(현재의 니가타현)의 우에스기가와 대결해, 에이로쿠 5년(1562)의 가와나카지마의 싸움을 거쳐, 시나노 평정이 일단락합니다. 하루신은 시나노의 통제에 관해서, 한때 시나노를 지배하고 있던 집에 자신의 아이들을 입양으로 보내는 것으로 융화책을 취했습니다. 카츠요리의 이모동생인 니시나 모리노부는 니시나가를 계승해, 카츠요리도 어머니의 친가였던 스와가의 명적을 이어, 이름도 스와 시로 카츠요리가 됩니다.
스와 카츠요리는 시나노 고원성주가 되어, 독자적인 재량권을 가진 영주로서 다케다가를 지지하는 것으로부터 전국 무장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초진은, 에이로쿠 6년(1563)의 우에노국(현재의 군마현) 미노와성 공격입니다. 나가노가의 가신 후지이 분고가, 물건에서 돌아오는 곳을 추격해 토벌했습니다. 그 후의 미노와성, 구라가노성 공격 등에서도 공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밖에 카츠요리는 에이로쿠 12년(1569) 무사시쿠니(현재의 도쿄도) 타키야마성 공격으로 호조씨 테루의 가로·제오카야마 성수와 세번 창을 합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 오다와라성 공격으로부터의 철퇴전에서는 전을 맡아, 마츠다 겐히데의 가로·사카이 토카에몬위와 마상에서 일기 토벌을 실시했습니다. 카츠요리 개인의 용기와 힘은 매우 뛰어나 무장으로서는 매우 우수했습니다.

요시노부 사건과 가독 상속

에이로쿠 8년(1565), 다케다 신겐의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와 그 악역인 이니토미 토라 마사 등 가신이 하루신의 암살을 기획했습니다. 그런데 호창의 친동생인 이이토미 사부로 무에의 밀서에 의해 계획은 노견, 호랑이 이하는 모반의 모모자로서 처형되어 의신도 유폐됩니다.
요즘 신겐은 기존의 시나노 침공에서 오다가와 동맹하여 이마가와가가 통치하고 있던 도카이 방면으로의 침공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桶狭間의 싸움에서 전사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아내로 하는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한 친이마가와 파와 대립이 일어나, 암살 계획은 그것을 기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차형의 용보는 태어나 맹목을 위해 출가하고, 삼형의 신유키는 뭉치고 있었기 때문에, 사남의 승뢰가 후계자로 정해집니다.
원래 장남도 아니고 스와가를 이어가던 카츠요리가 다케다가로 돌아가 자취를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가신의 통제를 어렵게 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런데 오다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다케다가는, 여러 세력과 함께 장군·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가해, 오다가와 동맹을 파기하면 모토가메 3년(1572)에는 서상 작전을 개시 했습니다. 카츠요리도 니시가미 작전에 참가해, 12월에는 미카타가하라의 싸움으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싸웁니다.
그러나 모토가메 4년(1573) 4월 12일, 신겐이 서상작전 도중에 병사해 버렸습니다.
거기서 급거 카츠요리가 스와 성에서 다케다 성으로 돌아가, 가독을 상속해 다케다가 제20대 당주가 됩니다. 앞면은 신겐의 죽음을 숨기고 은거로 하고, 카츠요리가 가독을 상속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

모토가메 4년(1573) 다케다 신겐이 사망했습니다. 이 신겐의 죽음과 다케다가의 철수에 의해 숨을 불어 넣은 것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입니다.
노부나가는 궁지를 벗으면 무로마치 막부 15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가와치국에 추방해, 반오리타세였던 아사쿠라가나 아사이가를 멸망했습니다. 또한 이에야스도 다케다 씨에 따라 있던 오쿠히라 사다노를 되돌려주는 등 다케다 가문의 서쪽에서 잃은 세력을 갈아 갈 것입니다.

다케다가를 이어진 카츠요리는 오다가나 도쿠가와가의 세력 회복에 대항하기 위해 시나노에서 미노국(현재의 기후현)과 토에구니(현재의 시즈오카현 서부)에 공격해 군사 활동으로 저항합니다. .
텐쇼 3년(1575년), 카츠요리는 도쿠가와가에게 되돌아온 오쿠히라가를 토벌하기 위해 1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미카와국에 침입했습니다. 5월에는 오쿠다이라 신창이 세워 놓은 나가시노성에의 공격을 개시합니다. 그런데 나가시노성에 세워 놓은 오쿠히라가는 끈기를 보여 공성전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거기에 오다가와 도쿠가와가의 연합군 약 38000명이 나가시노(설악가하라)에 도착해, 마방 울타리를 포함한 진성의 구축을 개시합니다. 이에 대해, 카츠요리는 나가시노성의 억제에 병사를 남기고, 12000명을 이끌고 설라쿠하라에 진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대치했습니다. 초전의 전투에서는 승리하고 있던 적도 있어 다케다군의 사기는 높았지만, 병력차이도 있어 결전인가 철퇴인가로 논의가 분규했습니다. 그러나 카츠요리는 결전을 선택합니다.

5월 21일, 오전 6시경 나가시노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수로 뒤떨어지는 다케다군이었지만, 과감하게 공세에 나와 연합군의 진지에 공격합니다. 몇 번의 공세를 시도했지만, 병력의 차이와 철포를 대량으로 박혀 타케다군은 총 무너졌습니다. 이 패주하는 가운데 오다가나 도쿠가와가의 추격은 날카롭고, 다케다가를 지지해 온 가신을 차례차례로 잃어 갑니다.
카츠요리는 스가누마 정충에게 도움을 받고 일시적으로 무절성에 머물렀지만, 결국 퇴각했습니다.

이 패배로 다케다군은 1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버렸습니다.
오다가나 도쿠가와가도, 필요 이상의 추격은 실시하지 않고 나가시노의 싸움은 종료합니다. 여기에서 수년, 다케다 가문은 도쿠가와 가와 토에 쿠니 나 스루가 국 (현재의 시즈오카 현 동부)에서 일진 일퇴의 전투를 실시했습니다.

미칸의 난

나가시노 합전에서 패배한 다케다가는 재건을 위해 외교에 힘을 쏟습니다. 거기서 오랜 세월 적대해 온 에치고국(현재의 니가타현) 우에스기가와의 동맹을 모색합니다. 우에스기가와는 가와나카지마의 싸움 이후에도 긴장 관계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텐쇼 3년(1575년), 도시를 쫓긴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다케다가와 호조가, 거기에 우에스기 가문의 3자 사이에서의 화목을 하도록(듯이) 호소합니다. 다케다가는 우에스기 가나 호조가와 동맹해 안정된 상황을 요구하고 있었으므로 제안에 동의합니다.
우에스기가는 다케다와의 화목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호조가와의 화목에는 난색을 보였습니다. 호조·우에스기간의 불화에 의해 미야의 동맹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다케다와 우에스기의 화목은 성립해 외교 상황의 개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3년 후의 텐쇼 6년(1578년), 우에스기 가의 당주였던 우에스기 켄신이 병사합니다. 겸신에는 아이가 없었고, 우에스기가의 흔적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명의 후보가 자칭을 올립니다. 호조씨 정의 동생으로, 우에스기 켄신에 입양한 가미스기 경호(구명·호조 사부로)와, 켄신의 언니의 아들로 켄신의 입양이 된 우에스기 경승입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가독을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미칸의 난입니다. 카츠요리는 호조씨 정으로부터 동생의 경호 지원을 요청받아, 카츠요리 자신이 에치고국에 출병해, 경승·경호간의 조정을 시도했습니다. 그 중에서 경승 쪽에서 다케다가에 화목이 들려 받아 받아들입니다. 카츠요리는 우에스기 경승과 화목해, 그 조건이었던 우에스기령을 다케다가에게 양도받으면, 한편으로 호랑이 쪽과의 화목 조정도 계속해, 양자의 화목을 성립시켰습니다.

카츠요리는 도쿠가와가가 다케다령에 침공해 왔으므로 에치고에서 되돌아갑니다. 그 사이에 경승·경호 사이의 화목은 파탄하고, 텐쇼 7년(1579년)에는 우에스기 경승의 승리에 의해 난은 수렴합니다.
결과적으로 카츠요리는 경승에도 경호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호조씨정이 요청한 경호의 응원이 완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케다가는 호조가와 험악한 관계가 되어, 동맹 관계는 파탄했습니다.

도쿠가와 호조 씨의 전투

다케다 카츠요리는 오다가나 도쿠가와가에 대항하기 때문에, 우에스기가와 동맹 관계가 되었습니다만, 호조가와 관계가 악화됩니다.
텐쇼 7년(1579), 4월에는 카츠요리는 스루가에지리성에 출병하면 도쿠가와가와 대치합니다. 또 7월에는 히가시우에노(현재의 군마현)에 진출, 호조가와도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카츠요리가 각지의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사이에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텐쇼 7년(1579년) 9월에는 도쿠가와·호조 사이에서 동맹이 성립해, 호조씨 마사가 누마즈에서 미시마에 침공, 이에야스도 씨정에 동조해, 다케다 영으로 출병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다음 텐쇼 8년(1580) 카츠요리가 출병해 호조가나 도쿠가와가와 대치했습니다.
이렇게 매년 카이 시나노 밖에 출병을 반복했기 때문에 다케다 가가신 안에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카츠요리의 죽음

텐쇼 9년(1581년), 카츠요리는 신부성(현재의 야마나시현 니라사키시)을 축성해, 본거 이전을 개시합니다.

다케다 카츠요리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