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키성오이타현 우스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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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키성 DATA
별칭단생도성, 거귀성, 가메가메성, 가메성
축성1562년
주소오이타현 우스키시 우스키 91
우스키성 교통편
JR 「우스키」역 도보 약 9분

HISTORY한때 바다에 떠 있었던 성구기성

우스키성은 오오토모 소네에 의해 오이타현 우스키시, 우스키만에 떠 있는 단생도에 있던 해성입니다. 축성 당시는 간조만 육지와 연결되어, 만조시에는 주위의 바다가 천연의 요해가 된다고 하는 구조였습니다. 현재는 우스키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런 우스키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오토모 소네에 의한 축성
우스키성은 우스키시나지마라고 불리는 우스키만 내에 떠 있는 섬 중 하나인 '단생도'에 16세기 후반에 오토모 종린에 의해 구축된 성입니다. 현재는 매립되어 육계가 되고 있습니다만, 당시 단생도는, 우스키만 내에 떠오르는 작은 섬에서 동쪽과 북쪽, 남쪽을 바다로 둘러싸여 서쪽만이 간조시에 육지와 연결되는 천연의 요해였습니다.
우스키성을 축성한 오토모 종린(의진)이, 언제쯤 이 성을 쌓았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일본에 포교에 온 선교사의 가스파르·빌레라가 예수회에 맞은 서한 등으로부터, 에이로쿠 5년(1562년)에 지어진 것이 통설이 되고 있습니다. 그 무렵 오오토모 소린은 모리씨와의 전투에 패하고 있어 오이타후내 오토모칸에서 단생도로 옮겨졌다고 추측됩니다. 오토모 소네는 우스키에 본거지를 옮기면 우스키의 항구와 성시가 일체화한 경제도시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절도 있어 실제로 그는 성을 만들 때 단생도 그 자체를 성채 화해, 섬 갯벌을 간척해 성시를 만들었습니다. 축성된 성은, 3중의 천수와 31기의 망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총 2층 구조의 무거운 상자 망치라고 불리는 망치가 특징적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토모 소네는 기리시탄 다이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만, 우스키성 내에도 예배소가 만들어져, 성시에는 기리시탄의 수련장도 만들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텐쇼 14년(1586년)에 시마즈군의 침공에 의한 단생도성의 싸움이 일어나면, 우스키성에 세워진 오토모군은 네덜란드로부터 수입된 「프랑키포」를 동원해 시마즈군을 걷어차는 등 분전했습니다만, 성도 성시도 크게 손해를 받고, 다음 텐쇼 15년(1587년) 실의 안에 오토모 소린은 사망했습니다. 오오토모 종린의 남남 오오토모 요시츠네는 도요토미가의 가신이 되어 시마즈씨와의 싸움에 도요토미군의 조력을 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을 도와줍니다. 오오토모 요시유키는 아버지 오토모 종린이 되어 세례를 받고 있었지만, 도요토미가의 가신이 되었기 때문에 기교령에 따라 기교했습니다. 그리고 문록경장의 역으로 적전 도망의 죄로 개역되면 성을 쫓겨납니다.
그 후를 이시다 미츠나리의 여동생인 후쿠하라 나오타카가 입성해, 3년간 거성한 후 게이쵸 2년(1597년)에 오타 이치요시에 새겨집니다. 오오타 이치요시는 산노마루의 증축이나 오테몬의 이축 등, 우스키성을 근대 성곽으로 개축해, 거의 현재의 형태로 조율했습니다.
에도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우스키성
게이쵸 5년(1600년)에 세키가하라의 싸움이 일어나, 에도 막부가 성립하면 미노쿠니군 카미하치만보다 5만석으로 이나바 사다쓰리가 입성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시대까지 이나바가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번이 열리고 나서 메이지 시대까지 이봉이 전혀 행해지지 않고, 1개의 집이 1개의 번을 다스린 전국에서도 드문 예입니다.
메이지 시대가 되어 폐번치현이 실시된 후, 메이지 6년(1873년)에 성내의 건물이 일부를 남겨 철거되었습니다. 그 후, 메이지 10년(877년)에 서남 전쟁이 발발하면, 노무라 닌스케가 지휘하는 사쓰마군 기병대의 진공에 대비해 구우스기 번의 가로였던 이나바 쿠리가 우스키대를 조직해 우스키성 에 세워져 있습니다만, 기병대의 습격에 패배해, 우스키성은 점거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 후 메이지 정부군이 4개 대대와 군함 3척의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우스키성은 빼앗겨 기병대는 쿠마타로 철수했습니다. 서남전쟁 종결 후, 메이지 20년(1877년)에 성의 주위가 매립되어 육계가 되었습니다.
쇼와 41년(1966년) 우스키성은 오이타현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헤세이 13년(2001년)에 니노마루 오테몬에 해당하는 다이몬 망치가 목조로 복원되었습니다. 현재는, 혼마루, 니노마루는 공원지로 지정되어 있어 복원된 망 외에 서원의 정원의 일부, 이시가키 등이 남아 있어, 시민의 휴식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2017년(2017년)에는 일본 100명성의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 천수각 등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봄에는 공원에 심어진 1,000그루의 벚꽃이 피는 흐트러지는 관광 명소가 되고 있습니다.

우스키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이가와 전투규슈 최강, 시마즈 씨가 본령 발휘, 오토모 씨를 깨다
전국시대, 규슈에서는 오토모씨, 시마즈씨, 류조지씨의 3세력이 싸우는 「큐슈 삼국지」상태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텐쇼 6년(1578년)에 히나타국 타카기로 가와하라(현 미야자키현 기죠마치)에서 오토모씨와 시마즈씨가 싸웠던 것이 “이카와의 싸움(타카죠가와의
이가와 전투

우스키성과 관련된 인물기 읽기

오토모 소네오토모 씨에서 가장 이름을 남긴 무장
일본 각지에서 패권 다툼이 펼쳐진 전국 시대, 규슈 지방에서도 유력한 무장이 대두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마즈씨와 늘어선 유서 깊은 무사의 가문이 오토모씨입니다. 오토모 요시진(이 기사에서는 소린과 표기) 시대에 유능한 가신
오토모 소네

우스키 성을 번청으로하는 우스키 번의 역사

우스키 번개번에서 한 집이 계속 치유
우스키 번은 오이타현 우스키시에 존재한 번입니다. 번이 열리고 나서 메이지 유신까지 이나바가에 의해 치료됩니다. 그런 우스키 번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에도 시대 이전의 우스키 번 에도 시대 이전, 우스키의 땅을 포함한 분고의 땅은 대
우스키 번
우스키 번 DATA
번청우스키성
구지역분고국
이시타카5만석
악보·외양외부
주요 번주이나바가
추정 인구7만 8000명(메이지 원년)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