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비성미야자키현 니치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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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비성 DATA
별칭마이즈루성
축성전국 초기
주소미야자키현 니치난시 기비 10초메
전화번호0987-25-1905
개관 시간9:30~17:00(입장은 16:30까지)
휴관일12월 29일~12월 31일
등각료어른 210엔, 대학생·고교생 150엔, 초·중학생 100엔
기비성에의 교통 액세스
JR 「기비」역에서 도보 15분

HISTORY이토 48 성 중 하나 기비 성

기비성은 미야자키현 니치난시 기비에 세워진 군곽식의 히라야마성입니다. 15세기에 히나타 중북부를 지배하는 이토씨와 규슈 통일을 모은 시마즈씨와의 싸움의 무대가 된 성으로, 에도 시대는 이토씨 기비번의 번청으로서 번창했습니다. 그런 기비성의 역사를 풀어 갑시다.

기비성의 시작
기비성의 시작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전국 시대 전기에 걸쳐, 히나타국 북부를 중심으로 무사단으로서 세력을 늘려 온 츠치지씨가, 남북조 시대에 요새를 쌓은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는 아직 성이 아니라 「기비원」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도지씨가 대대로 성주를 맡고 있었습니다만, 문명 16년(1484년)년에 히나타 중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이토씨가 세력 확대를 위해 기비에 침공하면, 규슈 통일을 목표로 하는 시마즈씨의 일족 가 기비성에 들어가 이토씨의 침공을 막으려고 합니다. 일단, 기비성은 이토씨의 손에 떨어지지만, 다음 문명 17년(1485년) 기비성을 다시 시마즈씨가 탈환. 이때 당주였던 이토 유쿠니가 전사합니다. 그 결과, 이토씨는 기비성에 대한 집착을 강화해, 여기에 80년 이상의 장에 걸친 시마즈씨 대 이토씨의 기비성을 둘러싼 싸움이 막을 열었습니다.
기비성을 둘러싼 싸움
이토 유쿠니가 전사 한 후, 이토 씨는 일시연자끼리가 가독을 둘러싸고 싸우는 내분 상태에 빠져, 이토 유국의 손자에 해당하는 이토 요시우리는 히나타를 쫓기까지 되었습니다만, 가신의 황무 삼성 등의 활약에 의해 난을 평정, 다시 가독을 되찾습니다. 이토 요시유키는 한 번은 출가했지만, 가독을 이은 형이 급속해졌기 때문에 환속하여 당주가 된 인물입니다. 그는, 기비를 영위하는 시마즈 도요슈가와 히나타 남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나중에 기비역이라고 불리는 긴 전역을 행합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13대째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화목 명령이 내려지는 등, 막부도 감은 싸움이 되었습니다만, 시마즈도 이토도 한 걸음의 당기지 않고, 마침내 막부가 와비를 「직할지」로 한다 명령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 요시유키는 명령을 무시하고, 기비에 대한 침공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제9차 기비역으로, 이토 요시유는 시마즈 타다 부모가 지키는 기비성을 약 5개월간에 걸쳐 포위해,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마즈가 제15대 당주, 시마즈 타카히사와 화목을 맺고, 기비의 땅을 손에 넣었습니다. 긴 싸움 끝에, 마침내 기비성을 손에 넣은 이토 요시유는, 이토 48성이라고 불리는 성이나 요새를 쌓아 영토의 수호를 굳힙니다. 그 중에는 기비성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염원의 기비를 손에 넣은 이토 요시유는, 이토씨의 본거인 사토하라를 「큐슈의 코쿄토」라고 불리기까지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모토가메 3년(1572년)에 일어난 규슈의 桶狭間이라고 불리는 「키자키하라의 싸움」으로 시마즈씨에게 대패한 것으로, 이토 요시유키의 힘은 쇠퇴해 갔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토 요시유는 기비를 쫓기고, 이 땅은 다시 시마즈씨의 물건이 됩니다. 이토 요시유키의 3남인 이토 유우병은, 혈연 의지하고 오다씨를 섬기게 되어, 이윽고 하시바 히데요시의 여력이 되었습니다. 텐쇼 10년(1582년)의 야마자키 전투에서 활약해, 텐쇼 15년(1587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에 의해 시마즈씨가 히나타국을 방축된 후에는, 구령 중 청무·아오이 등을 회복되어 2만8천석의 다이묘로 복권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오비의 소령도 주어져 3만8천석으로 가증되었습니다. 이렇게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기비는 정식으로 이토씨의 소령이 된 것입니다. 물론, 기비성도 이토씨의 것이 되었습니다.
에도시대의 기비성
게이쵸 5년(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는, 이토 유병은 서군에 아군이라면 걸어 보여주고, 적자인 이토 유케이를 동군에 아군 시킵니다. 그 때문에, 세키가하라의 싸움 후에는 소령을 안도되고, 기비번의 번주가 되었습니다. 이후, 기비성은 기비번의 번청으로 메이지까지 이토가의 거성이 됩니다. 덧붙여 기비성은 중세의 모습을 짙게 남기는 형태였지만, 2대째 번주인 이토 유케이는 성보다 성시의 정비에 힘을 다합니다. 그 후, 관문 2년(1662년)의 외소(톤도로) 지진을 시작으로 3번의 지진에 휩쓸려 성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그때마다 막부의 허가를 얻고 수리를 실시해, 조금씩 이시가키를 갖춘 현대적인 성곽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메이지 이후의 기비성
메이지가 되면 폐성령을 받고, 기비성의 건물은 거의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쇼와 53년(1978년)에는 오테몬, 쇼와 54년(1979년)에는 성주의 거관인 마츠오노마루가 복원되었습니다. 또, 혼마루 자취인 기비 스기바야시는, 2004년) 후기의 연속 텔레비전 소설 「와카바」의 로케지가 되어, 단번에 지명도가 올랐습니다. 기비성 역사 자료관 등도 부지 내에 있으며, 니치난시의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헤세이 18년(2006년)에는 일본 백명성의 하나에도 선출되었습니다.

기비성과 관련된 사건 읽기

규슈평정히데요시가 시마즈를 내려 규슈를 지배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 통일을 진행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대의 라이벌·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텐쇼 12년(1584년)의 코마키·나가쿠테의 싸움을 계기로 신종시키고, 텐쇼 13년(1585년)에 나가소카베 모친을 내려 시코쿠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규슈평정

기비성과 관련된 인물기 읽기

이토 유병이토씨 중흥의 조
전국 시대, 도카이 지방이나 기내에서는 「교토에 상경해, 기내를 억제하는 것이 천하 통일의 하나의 지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규슈의 땅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펼쳐졌습니다. 오토모 씨와 시마즈 씨와 싸우고, 일단 몰락
이토 유병

기비성을 번청으로 삼아, 기비번의 역사

기비번시마즈 씨와의 긴 영지 싸움의 결과, 이토 씨의 것에
기비번은 에도시대를 통해 히나타 이토씨 14대에 걸쳐 다스린 번입니다. 번청인 기비성은 무로마치 시대 말기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까지 100년 가까이 시마즈씨와 이토씨가 소유를 둘러싸고 싸웠습니다. 하나의 영지 (성)
기비번
기비번 DATA
번청기비성
구지역히나타 쿠니 미야자키 군 · 나카 군
이시타카5만7000석
악보·외양외부
주요 번주이토야
추정 인구4만 8000명(메이지 원년)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