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모토나리 (1/2)모신

모리 모토나리

모리 모토나리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모리 모토나리(1497년~1571년)
출생지
히로시마현
관련 성
히로시마 성

히로시마 성

전국 시대를 통해 중국 지방의 안예국(현재의 히로시마현)에서 나와 대세력까지 성장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모리가입니다. 전국시대 초반, 안예국의 소호족 모리씨에게 모리 모토나리는 태어났습니다. 모토나리는 어렸을 때부터 고생을 거듭해, 대세력이었던 오우치가나 아마코가의 위협에 노출되면서 중국 지방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중국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시대를 뛰어난 모리 모토나리에 관해 보고 싶습니다.

모토나리의 태어난 모리가

아키쿠나(현재의 히로시마현 서부)의 모리가는, 가마쿠라 막부를 건설한 겐요리 아침의 측근 오에 히로모토의 4남 모리 계광을 조로 합니다. 남북조 시대에 아키쿠니 요시다 고리야마(현재의 히로시마현 아키 타카다시)에 하향하면, 유력한 국인으로서 힘을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무로마치 시대가 되면 아키나쿠의 주변, 야마나씨나 오우치씨, 아마코씨 등의 유력 다이묘에 간섭되어 괴로운 시대를 보냅니다. 그런 가운데, 모리 모토나리는 명명 6년(1497) 모리 히로모토의 아이로서 태어납니다.

모토나리가 태어난 메이코 6년(1497)은 교토의 도시에서 오인의 난이 끝나고, 호소카와 마사모토, 히노 토미코가 주도한 쿠데타 아키노부의 정변이 일어난 시대입니다. 전국 시대는 일설에 명응의 정변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므로, 전국 시대의 시작에 모리 모토나리는 태어났습니다.

모토나리의 탄생과 양모 삼나무

모리 모토나리는 明応 6년(1497) 안예국의 국인 모리 히로모토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지는 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스즈오성(후쿠하라성)이라고 불리며 전 취생 탄의 비석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히로모토는 빨리 장남의 모리 흥원에게 당주의 자리를 양보하면 차남의 모토나리를 데리고 다지비 원숭이 가케성(타지히사루가케조)에 옮겨 살 것입니다. 그런데 모토나리 10세까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죽으면 살았던 다지비 원숭이 가케성을 가신 이노우에 모모리에게 빼앗겨 유랑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도운 것이 아버지의 측실이었던 스기 대방입니다. 스기오타는 흥원이 죽은 후에도 모리가에 남아, 모토나리의 양모가 되어 키웠습니다. 그동안 모토나리의 형으로 모리가의 당주였던 모리흥원은 속하고 있던 오우치가에 따라 교에 종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에이쇼 8년(1511), 스기오타는 교토에 있던 오빠의 흥원의 허가를 받아 모토나리는 전복했습니다. 모리가의 분가로서 다지비(단비) 모토나리라고 자칭합니다.

그런데, 전복한 5년 후의 영정 13년(1516), 장형·흥원이 급사합니다. 모토나리는 삼촌으로 사망한 형의 아들의 코마츠마루를 후견했습니다. 이 조카의 후견을 하고 있던 시대에 초진을 완수하고 크게 전과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가 3년(1523), 후견하고 있던 조카의 모리 유키마츠마루가 죽습니다. 모리가의 직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모리 모토나리는 27세에 가독을 이어 모리가의 당주가 되었습니다.

아마코 씨와 오우치 씨

그런데 분가의 몸에서 본가의 모리씨를 이어받은 모리 모토나리. 이 본가의 가독을 상속한 전후, 혹은 그 이전부터 모리가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주방국(현재의 야마구치현)의 수호 다이묘 오우치가와 동쪽에 위치한 산인의 다이묘 아니코가에 끼워 되었습니다.

형으로 죽은 모리 흥원의 무렵은 오우치가에 속하고 있었습니다만, 모리 모토나리가 조카를 후견하고 있었을 무렵에 아마코가에 안장 바꿉니다.

그런데 아마코가는 모리 모토나리의 당주 취임에 불만을 가지고 모리가에 개입합니다. 모토나리의 이모제였던 상합 원강을 다른 가신들이 옹립해 대항했습니다. 모토나리는 스스로 반항한 가신들을 숙정하는 등 안예국의 계약에 쫓겨납니다. 여기에서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코가에서 벗어나 오우치가에 속했습니다.

오우치가의 당주 오우치 요시타카는 모리가와의 관계 강화를 도모합니다.朝廷에 모리 모토나리의 관위 임명을 맡아, 이로써 모토나리도 관위를 얻는 것으로 다른 안예국인중에게 오우치가나 조정의 뒤 방패를 나타내 큰 존재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모토나리는 장남을 오우치가에 인질로 내고 관계를 견고하게 합니다.

요시다군 야마시로의 싸움과 츠키야마 도미타성의 싸움

천문 8년(1539), 아키나쿠의 영향력이 저하된 아마코가는 3만의 병사를 정돈하면 모리 모토나리의 거성 요시다군 산성을 공격합니다. 모토나리는 3천의 병사로 고리야마성에 처치하면 아키나쿠의 국인중이나 오우치가의 도움도 빌려 격퇴했습니다(요시다군 산성의 전투). 이 전투의 모습을 모토나리는 일기에 철하면(모리 모토나리군 야마타성 일기) 무로마치 막부에 제출 중앙정계에서도 아키쿠니는 모리 모토나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같은 해 아키쿠니 수호 다이묘였던 아키 타케다 가문을 오우치 가문과 쫓아내면 명실 모두 아키쿠니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후의 일입니다. 천문 11년(1542), 오우치가를 중심으로 한 토벌군이 이번에는 아마가가의 츠키야마 도미타성을 공격합니다, 모리 모토나리도 참진했습니다. 이 전투는 오우치 가문의 총붕괴가 되고, 모토나리는 아군의 마지막 꼬리인 전군을 명하게 됩니다. 이때 모리가의 가신들이 모토나리의 대체가 되어 궁지를 벗은 것으로 아키쿠니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오우치가와 아마코가와의 싸움은 장기화하고, 그 싸움 속에서 모리 모토나리는 아키나쿠를 긴축력을 축적합니다.

아키 국세력 확대와 모리 료카와

천문 13년(1544), 모리 모토나리는 타케하라 코바야카와가에 3남의 토쿠스마루(후의 코바야카와 타카케이)를 입양한다. 다케하라 코바야카와가는 모리가의 친척이었지만 흔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다케하라 코바야카와가는 강력한 수군을 옹호하고, 세토나이카이에의 발걸음을 얻습니다.

또한 다케하라 코바야카와 가문의 본가에 해당하는 누마타 코바야카와 씨의 당주에 코바야카와 타카미 경을 보냅니다. 누마타 코바야가와의 당주 코바야카와 시게라는 어린 시선이었기 때문에 출가시켜, 3남 다카카게에 코바야카와가의 관리를 명령했습니다.

한편으로 천문 16년(1547), 모토나리의 정실 묘구의 친가인 요시카와가에 2남의 원춘을 보냅니다. 정실묘창의 조카로 요시카와가 당주였던 요시카와 흥경은 신참의 가신을 중용한 결과, 집안이 두 갈래로 깨졌습니다. 그 결과, 모토나리는 흥경을 강제로 은거(나중에 암살)시켜 요시카와 모토하루를 당주에게 거뒀습니다. 이 2남 요시카와 모토하루와 3남 코바야카와 타카케이가 모리 모토나리의 생존중, 혹은 사후에도 모리를 도와 「모리 료카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쓰쿠시마 전투

모리모토나리가 아키나라 속에서 세력을 굳히고 있는 동안, 모리가가 속하고 있던 오우치가에서는 불온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군사적인 침공으로 영지 밖으로 확대해 나가고 싶은 도청현을 중심으로 한 무단파와, 안정된 정치로 국내의 통치를 우선하고 싶은 사가라 무임을 중심으로 한 문치파로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츠키야마 도미타성에서 대패한 당주의 오우치 요시타카는 싸움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