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 무네 전 (1/2)오히토의 난의 서군 대장

야마나 무네

야마나 무네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야마나 무네전(1404년~1473년)
출생지
교토부
관련 성
니조성

니조성

무로마치 시대의 중기, 속에 전국 시대라고 불리기 전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무로마치 막부를 지지하는 4직의 하나, 산명가에 한 명의 걸물이 탄생했습니다. 야마나 무네 전입니다. 종전은 3남으로 태어났습니다만, 가독을 이어가면 세력을 늘려 갔습니다. 특히 막부가 불안정한 시기에 들어간 시기로, 끊임없는 권력 다툼 속에서 발판을 굳혀 갑니다. 그리고 만년에, 제국의 다이묘를 말려들었던 오히토의 난이 일어나자 서군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야마나 씨

야마나 씨의 조상은 가마쿠라 시대, 일찍부터 겐토요 아침에 따른 고가인이었기 때문에 우대되고 있었습니다.

남북조 시대가 되면, 연척이었던 아시카가 존씨에 따라 북조측에 서서 산인 지방에서 싸웁니다. 이 공적이 평가되고, 야마나 씨는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각지의 수호(국주)에 임명됩니다. 백호국(돗토리현 서부), 탄고국(교토부 북서부), 기이국(와카야마현), 이나바쿠니(돗토리현 동부), 탄바국(효고현 북중부), 야마시로국(교토부), 이즈미국 (오사카부 남부), 미작국(오카야마현 중부), 타지마국(효고현 중부), 비고국(히로시마현 동부), 하리마국(효고현 서부)을 영위해 일족이 그 경영에 해당했습니다. 전국 66개국 가운데 11개국을 영위한 것으로부터 「6분 일전」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또 아시카가 요시만으로부터 사무라이 장관(무사의 통율이나 재판의 재정을 실시하는 장)을 내는 4직의 일가로 정해져 열매와 이름을 겸비한 집이었습니다.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리와 야마나 종전의 탄생

야마나 종전은 오나가 11년(1404), 야마나 씨의 종가 당주였던 야마나시 熙의 3남으로 태어납니다. 이름은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한자를 받고, 지풍이라고 자칭하고 있었습니다만 만년에 출가해 종전이라고 자칭합니다(이 이야기를 통해서, 종전에서 통일합니다).

종전이 태어난 무로마치 시대는, 정이 대장군에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취업하고 있던 시대였습니다. 요시지는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만의 장남으로서 태어나 아버지의 요시만으로부터 장군직을 선양되었습니다. 요시모치의 통치한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를 통해서도 비교적 안정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종전은 오오나가 28년(1421) 12월, 비고국(히로시마현 동부)의 국인중을 인하 수호산 명희고와 함께 토벌하는 것으로 초진을 완수합니다.

5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히로와 야마나 종전의 가독 상속

장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지는 오오나가 30년(1423)에 장군직을 아이의 의량에 양보합니다. 의량은 아버지의 의지에 후견되는 형태로 장군이 되었습니다, 5대 장군 아시카가 의양입니다. 그런데 오오나가 32년(1425)에 재위 2년 정도로 의량은 사망합니다.

아버지의 요시유키는 의량이 죽으면 실질적으로 막부를 운영했는데, 그 요시지는 응영 35년(1428)에 죽습니다. 이 죽었을 때, 의지에도 먼저 죽은 아이의 의량에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즉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만의 장남, 아시카가 요시유키의 가계는 여기서 끊어집니다. 게다가 요시지는 후계자를 결정하는 것을 거부한 채 죽었습니다.

막부를 운영하고 있던 관령하타야마씨를 시작으로 막부 중신은 협의의 결과,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만의 아이(죽은 4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의 동생들)로부터 고래 당기로 다음의 장군을 선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했다.
이렇게 장군이 된 것이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만의 5남, 아시카가 의교입니다. 의교는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이의 야마나 종전입니다. 야마나가는 오나가 27년(1420)에 장남의 야마나 만시가 사망합니다. 이것으로 야마나가의 상속자는 차남의 야마나 지희, 3남의 야마나 종전이 되었습니다.
오오나가 35년(1428)에는 아버지의 산명시희가 병에 쓰러져 종전을 후계자로 하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6대 장군이 된 아시카가 의교는 측근을 맡고 있던 차남의 야마나 지희를 후계자로 하도록 명령합니다.

아버지의 산명시희는 병에서 회복하고 한번은 후계문제를 선송했지만, 에이유 3년(1431)에 차남의 야마나 지희는 장군 아시카가 의교에서 용기를 넘어 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마나 종전은 야마나가 종가의 가독을 계승했습니다. 차남의 야마나 지희는 이것을 불복으로 종전에 대해 거병했습니다만, 종전에 공격받아 논쟁당합니다.

에이유 5년(1433), 야마나 종전은 아버지를 대신해 야마나 무네가의 당주가 되어, 타지마, 비고, 아키, 이가의 수호 다이묘, 게다가 에이유 12년(1440)에는 막부 사무라이 소두인 가네야마성 수호가 되었습니다. 야마나 무네전은 30대 중반으로, 실질도 형식도 겸비한 충분한 실력자가 되었습니다.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와 가요시의 난

그런데 고지로 선택되었다(혹은 문자 그대로 이겼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만)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
「챙김 장군」이라고도 불린 의교였지만, 장군에 권력이 집중하는 정치 체제를 바란다. 형에서 4대 장군이었던 요시모리, 조카로 요시모리의 아들이었던 5대 장군의 의량, 이 2대에 걸쳐 저하된 장군의 권위를 회복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때까지 장군의 가신이 실시하고 있던 재판을 직접 취하거나, 각지의 수호(국주)의 후계쟁에 개입하거나와 정력적으로 활동해 갑니다. 그런데 지나친 권력 집중에 대한 소망은 공포 정치가 되어 「만인 공포」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중간 사건이 발생합니다. 에이유 9년(1437)경부터 하리마의 수호 다이묘, 아카마츠 만유가 장군에게 토벌된다는 소문이 흘렀습니다. 또 에이유 12년(1440)에는 아시카가 의교가 중용하고 있는 아카마츠가분가의 아카마츠 사다무라에 만유의 동생의 소령을 몰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요시 원년(1441) 6월. 위로라는 명목으로 아카마츠 만유는 장군 아시카가 의교에게 「장군 어성(장군이 가신의 옥형에 방문해 축연을 여는 정치 의식)」을 요청합니다. 아시카가 의교는 이것을 수락해, 측근의 다이묘나 공가를 데리고 아카마츠 저택에 방문합니다. 이때 야마나 무네 전도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저택에서는 연석이 개최되어 원숭이를 감상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택의 문이 모두 닫히고, 아카마츠 만유는 장군을 살해했습니다. 또 동행하고 있던 다이묘, 공가도 살상당해 야마나가도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 자도 있었습니다만, 종전은 저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요시의 난」입니다.

아카마츠 만유 등 아카마츠씨는 막부의 토벌이 온다고 생각해, 미리 자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사건이 일어난 일로 도시는 조용히 돌아와 상황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밤이 되어 관에 불을 붙이자, 아카마츠 만유는 창 앞에 아시카가 의교의 목을 내걸고 영국의 하리마국으로 퇴거해 갔습니다.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와 야마나 종전의 아카마츠씨 진압

가요시의 난으로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는 사망했습니다. 난을 일으킨 아카마츠가는 영국의 하리마국으로 돌아갑니다. 막부에서는 차기 장군의 토론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차기 장군으로 정해진 것이 아시카가 의교의 아들, 8세의 의승입니다. 정식에는 다음 해에 9세로 취임한 요시카츠는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되었습니다. 또, 이 취임 후에 관령이 되어 7대 의승을 보좌한 것이 하타야마 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요시의 난이 일어난 직후의 야마나 무네 전입니다. 종전은 영국의 타지마국으로 돌아오면 산명 일족을 따라 아카마츠 만유의 하리마국으로 침공합니다. 침공은 성공해 종전은 하리마 일대를 지배하에 둘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여기에서 아카마츠씨는 하리마국 탈환의 운동을 실시해 갑니다.

가요시 3년(1443)의 일입니다. 가요시의 난으로 살해된 일족의 야마나 희귀의 딸을 양녀로 맞이해, 주방이나 나가토 등의 수호 다이묘였던 오우치 교홍에게 아내가 시킵니다. 이 부부 사이에 생긴 아이가 오닌의 난으로 종전과 짜서, 서군 주력이 되는 오우치 마사히로입니다.

분안 4년(1447)에는 마찬가지로 야마나 희귀의 딸을 양녀로 한 다음 막부 관령인 호소카와 카츠모토에게 아내가 있게 합니다. 이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오히토의 난으로 종전과 적대하는 동군 대장이 됩니다. 즉 서군의 대장산 명종전은 주(義理의 아버지), 동군 대장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사위(義理의 아들)였습니다. 다만 종전과 카츠모토는 오히토의 난이 시작될 때까지 손을 잡고 정쟁을 싸웁니다.
이렇게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취임한 직후에는, 야마나 무네전은 인사 관계를 사용해 지반을 구축해 갑니다.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문정의 정변

가요시의 난으로 사망한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아들,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카츠는 취임 9개월의 가요시 3년(1443)에 퇴절합니다. 관령이었던 하타야마 지국은 운동해 주위와 협의한 결과, 6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의 아들, 7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카츠의 동생의 의정을 장군에 둔다.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8세에 장군이 되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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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