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고국 (1/2)전국 시대 전반의 픽사

호소카와 고국

호소카와 고국

기사 카테고리
인물기
이름
호소카와 고국(1484년~1531년)
출생지
오카야마현
관련 성
아마가사키 성

아마가사키 성

무로마치 시대, 오히토의 난 후에 일본은 전국 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전국으로 불린 시대의 전반, 교토에서는 장군이나 관령 호소카와가가 이산 집합해 거친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 중심에 있던 것이 호소카와 고국이었습니다. 호소카와 고국은 호소카와가의 서류에서 태어났습니다만, 「반장군」이라고 불리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의 한 사람에게 맞이됩니다. 이번에는 그런 전국 시대 전반의 키맨이 된 호소카와 고국을 보고 싶습니다.

호소카와 고원의 양부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전국 시대의 시작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오히토의 난
오인 원년(1467), 각지의 다이묘의 집 소동에 가장자리를 발해 일본을 이분하는 싸움이 된 오토의 난이 시작됩니다. 오인의 난은 약 11년간 계속 끝났지만 일본의 각지에 불씨가 남아 전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9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흔적을 이어받은 것은 아시카가 요시마사와 마사무로 히노 토미코 사이에 생긴 9대 아시카가 의교였습니다. 그 의교를 뒷받침한 것이 오인의 난으로 동군의 대장이었던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아들, 호소카와 마사모토입니다.
9대 장군 의교의 시대는 아직 막부와 장군에 권위가 있어 불안정하면서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의교는 오미의 싸움으로 체진 중에 젊어져 죽습니다.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와 명응의 정변
9대 장군 아시카가 의교가 죽어, 다음의 장군이 된 것은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시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시나가의 전횡에 반발한 것이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히노 토미코입니다. 두 사람은 쿠데타를 일으켜 장군을 꽂아 넣은 명명 2년(1493)에 일어난 「명응의 정변」입니다. 정이 대장군이 막부 안에서 정해지는 일 없이, 가신(호소카와 마사모토)에 의해 옹립된 것으로 장군이 형해화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전국 시대에 들어갔다고 최근에는 생각되고 있습니다.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쿠데타를 일으켜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리는 교토를 피해 유랑합니다. 대신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동생으로 호리코시 공방이라고 불리는 아시카가 마사치의 아이,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가 취임해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이를 지지합니다. 오히토의 난으로부터 명응의 정변과 계속 혼란한 교토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에 의해 안정될까 보였습니다.

호소카와 고국의 출생과 의리의 형제

명응의 정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10대 장군 아시카가 아시카가 요시노부로부터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에 장군을 꽂은 호소카와 마사모토. 정원의 정권 아래 오인의 난으로 이어진 교토의 혼란은 종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수험도 등에 근무해 평생 여성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호소카와 요시조가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흔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호소카와 요시조가의 자취로서 3명의 아이를 입양에 맞이합니다.

  • 세키 하쿠 쿠조 마사키의 막내였던 스미노
  • 호소카와가 서류의 아와쿠니 수호 호소카와 요시하루의 아이인 스미모토
  • 호소카와가 서류의 노스가 호소카와 마사하루의 아이였던 고국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처음 입양한 것이 오섭가인 쿠죠가로부터 맞이한 스미유키였습니다. 그런데 호소카와 마사모토는 호소카와씨 중에서 입양하지 않고 구조가로부터 입양한 것을 후회하고 다른 호소카와 가서류에서 입양을 맞이합니다. 이것이 2번째의 양자로 아와쿠니 수호 다이묘 호소카와가로부터 맞이한 스미모토와 3번째의 양자로서 노스가로부터 맞이한 호소카와 고국이었습니다.
호소카와 고국은 호소카와가 서류, 노스가 호소카와 마사하루의 아이로서 문명 16년(1484)에 태어납니다. 고국은 호소카와 마사모토 아래에서 전복했습니다.

정원의 죽음과 양 호소가와의 난

그런데 호소카와 마사모토에서 첫 입양으로 맞이한 호소카와 스미유키. 스미유키는 양부 호소카와 마사모토로부터 단바국 수호에 임명되었지만, 호소카와 요시가의 흔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스미노와 그 가신들은 흥미롭지 않습니다. 스미노의 한 당은 강경 수단에 나가는 것을 획책했습니다.

에이쇼 4년(1507) 6월, 호소카와 스미유키의 가신들은 호소카와 마사모토를 저택에서 암살했습니다(영세의 착란). 단바국에 있던 스미노는 가신들에게 맞이되어 호소카와 요시조가의 가독을 이어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장례식도 집행합니다.

그런데 그 2개월 후인 8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다른 양자들 스미모토와 고국은 도망쳐 있었습니다만 긴키의 무사들을 규합. 스미모토와 고국은 호소카와 스미노를 토벌하고 스미노는 자해합니다. 호소카와 고국은 스미모토를 세우고,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호소카와 요시조가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호소카와 고국. 처음이야말로 손을 잡은 스미모토와 고국이었지만 이 후, 두 사람의 계통은 전국 시대의 전반 50년 정도를 싸워 「양 호소 강의 난」이라고 불리는 다툼을 계속합니다.

오우치씨의 침공과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재임

이렇게 호소카와 요시조가의 당주가 된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두 번째 입양이었던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고국은 스미모토를 지지합니다.
그런데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되어 정정 불안이 된 상황을 호기로 파악한 다이묘가 있었습니다. 영세 4년(1507), 오우치 요시오키는 유랑하고 있던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를 옹립하면 대군을 정돈하자 교에 침공했습니다.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옹립하고 있던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오우치씨의 침공이라는 사태에 놀랐습니다. 대군을 옹호해 온 오우치 요시오키와 정면에서 싸워도 승부가 되지 않습니다.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호소카와 고국에 명령하여 오우치 요시오키와의 화목 협상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파견된 호소카와 고국은 오우치 요시코의 아래를 방문하면 내응(배신)을 약속해 버립니다. 호소카와 고국은 호소카와 가내나 기내의 다이묘 국인에게 반 호소카와 스미토모를 모집한 결과, 관령이었던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오미국에 추방했습니다.

참석한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미는 조정에서 장군으로 재임되었으며, 이것은 역사상 유일한 재임된 정이 대장군이었다. 또한 호소카와 고국은 관령에 오우치 요시코는 관령대(관령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음 2파가 다투어 가게 됩니다.

  •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리, 관령 호소카와 고국, 관령대 오우치 요시오키
  •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 호소카와 스미모토

호소카와 고국,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에 배신된다

영세 4년(1507). 오우치 요시코의 군사적인 뒤 방패 아래,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를 옹립한 관령 호소카와 고국. 여기에서 오미국을 거점으로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옹호한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일진 일퇴의 공방을 반복합니다.
그동안 오미나라에 있고 호소카와 스미모토에 옹립되어 있던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는 병사합니다. 옹립하는 장군이 없어진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출신인 아와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런데 영세 15년(1518). 군사적인 기반이었던 오우치 요시코가 주방국으로 귀국합니다. 오우치 가문은 중국 지방을 중심으로 한 다이묘였습니다. 그 때문에, 가신들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고 있는 것에 싫증이 났고, 교토로부터 이탈해 갔습니다. 또한 산인 지방의 아마코 경구에 영지를 압박되기 시작한 것으로 오우치가는 귀국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호소카와 고국은 단독으로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를 지지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호기로 파악한 것이 아와쿠니에 있던 호소카와 스미모토입니다. 스미모토는 긴키에 침공하고 한번은 호소카와 고국을 교토에서 쫓아냅니다. 이것에 위기감을 가진 것이 호소카와 고국에 옹립되고 있던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였습니다. 아시카가 요시카네는 호소카와 고국을 보아 아파국에서 침공해 온 호소카와 스미토모로 안장 바꿉니다.

이에 대해 교토에서 도망친 호소카와 고국은, 육각가나 아사쿠라가, 사나미가의 지원을 받아 교토보다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부를 쫓아내었습니다

교토로 돌아온 호소카와 고국. 그런데 옹립하고 있던 장군도 추방했기 때문에 장군 부재의 불안정한 정권이 됩니다. 거기서 병사한 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의 장남 카메오 마루를 옹립해 장군에 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다음 2파가 다투어 가게 됩니다.

  • 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11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스미), 관령 호소카와 고국
  •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리, 세화 스미원

사카이 공방과 호소카와가의 대립

12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를 옹립한 호소카와 고국은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나미와 세화 스미토모로부터 자주 침공을 받았지만 격퇴합니다. 그리고 에이쇼 17년(1520) 호소카와 스미유키가, 오나가 3년(1523)에는 10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가 병사합니다.
이렇게 일단은 호소카와 고국의 정적이 없어져, 안정된 상황이 생겼습니다.

호소카와 고국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일본 성 사진 콘테스트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