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류싱 (1/2)망치가 일으킨 밑위의 끝

사이토 류싱

사이토 류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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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기
이름
사이토 류싱(1548년~1573년)
출생지
기후현
관련 성
기후성

기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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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후기, 질서가 붕괴한 시대. 출자나 지위와는 관계없이 실력만으로 늘어나 다이묘가 된 시대이기도 하였습니다. 간토의 호조 조운 등은 시모카이의 선구자로 유명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미노국의 주인이 된 사이토 미조도 대표적인 혼자입니다. 도조는 미노를 빼앗았지만, 그 손자를 맞는 것이 사이토 류싱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미치 산류 사이토가 마지막 당주가 되는 사이토 류싱의 일생을 보고 갑니다.

미노국의 길 산류 사이토가

무로마치 시대, 미노국(현재의 기후현)은 수호(국주)를 토키씨, 수호대(수호를 지지하는 역)를 사이토씨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 미노국에 온 것이 마츠나미 쇼고로(마츠나미 쇼고로)입니다. 쇼고로는 교토에서 유매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일념 발기해, 미노쿠니 쵸재지의 주직 일운을 통해서 수호 도기가의 가신 나가이 나가히로의 가신이 되었습니다. 이 때, 쇼고로는 나가이가의 가신 니시무라에 아야카리 니시무라 칸쿠로 마사토리라고 합니다. 교토의 기름판매를 하고 있던 마츠나미 쇼고로는 미노쿠니 토키가 가신 나가이가를 섬기고 니시무라 칸쿠로 마사리가 되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 중기, 오히토의 난이 일어난 1470년경은 각지의 다이묘가 부모와 자식, 형제로 가독 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토키가도 마찬가지로 형제로 가독 다툼을 실시하고 있으며, 니시무라 칸쿠로는 그 다툼 속에서 토키가의 신뢰를 얻어 두각을 나타냅니다. 지위를 높인 니시무라 감구로는 섬기고 있던 나가이가의 성으로 바꾸어 나가이 분고라고 말합니다.
교토에서 미노국으로 온 마츠나미 쇼고로. 마츠나미 쇼고로는 사무라이가 되어 나가이 분고가 되었습니다만 천문 2년(1533)경병에 걸려 아들의 나가이 노리히데에게 가독을 건네주었습니다.

나가이 분고로부터 가독을 받은 아들의 나가이 노리히데도 미노국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특히 미노쿠니 토키가의 가독 싸움은 계속되고 있으며, 나가이 규슈는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천문 7년(1538)경에는 미노국 수호대 사이토 씨에게 아야카리 성을 나가이에서 사이토로 바꿔 사이토 리마사라고 자칭합니다. 천문 10년(1541)경부터 사이토 토시마사는 수호 토키씨의 일문을 독살, 추방해 사실상 미노국의 국수가 됩니다. 그리고 천문 17년(1548)경에 사이토 토시마사에서 사이토 미조로 재개했습니다. 이것이 사이토 미치코가 가는 미노국의 시모카미이며, 미치유키 사이토가의 시작입니다.

마츠나미 쇼고로와 사이토 미조의 2대에 의해 행해진 미노국의 시모카미. 그런데 무리를 눌러 미노국을 빼앗았기 때문에 정정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이토 미조의 嫡男, 사이토 요시히로는 추방한 토키가의 자식이 아닐까라고 말해져, 점차 사이토 미조와 사이토 요시히로와는 불중이 되어 갔다고 합니다. 미치나미의 사무라이들은 사이토 요시히로를 지지했고, 도조는 은거했습니다. 그러나 도조와 요시류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고 히로지 2년(1556)에는 전투로 발전합니다, 나가라가와의 전투입니다. 사이토 미조는 이 전투에서 토사했습니다. 이렇게 미노국은 나가라가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이토 요시히로에 의해 통치되어 갑니다. 이 의룡의 아들로서 태어나는 것이 사이토 류싱이었습니다.

용흥의 출생과 가독 상속

사이토 류싱은 천문 17년(1548), 아니면 천문 18년(1549)에 미노국에서 태어납니다. 유명은 키타로. 어머니는 사이토 요시히로의 정실 오미 쪽이었습니다. 오미 쪽은 키타 오미 아사이 가문의 당주 아사이 쿠마사의 딸이라고합니다. 에서 쿠마사의 양녀가 된 후에 사이토 요시히로에게 시집다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로부터 보면 사이토 류싱은 사이토 미치조의 손자(미치조와 요시 류가 정말로 부자 관계에 있었을 경우), 모방으로부터 보면 아사이 나가마사와는 종제의 아이끼리에서는 토코 관계에 있었던 일에 됩니다.

의룡이 8살 때, 부의룡과 조부도 3이 싸운 나가라가와의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에서 부의룡이 미노국 당주가 되어 오와리국(현재의 아이치현)에서 발흥해 온 오다 노부나가와 미노, 오와리 사이에서 자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이로쿠 4년(1561), 사이토 류싱 14세 무렵. 아버지의 의룡이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가독과 미노국의 국수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러나 마츠나미 쇼고로, 사이토 미조와 2대에 걸쳐 시로상에서 미노국을 빼앗아 온 미치사토 사이토가. 게다가 도조와 요시 류도 나가라가와의 싸움을 일으키고 있어 정정은 안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라를 14세의 용흥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힘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용흥은 사이토 히다모리를 중용했습니다. 그런데 의지받은 사이토 히다모리, 주위의 평판이 나빠 가신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미노국의 무사들(모리 가세이, 사카이 마사히로, 호리 히데시게, 사이토 리지, 아케치 미츠히데 등)는 미노국과 사이토가를 버리고, 싸우고 있던 오다가나 제국에 출분해 갔습니다. 사이토 류싱은 젊어서 국주가 되었지만, 괴로운 영국 운영을 강요받습니다.

이나바야마성과 다케나카 반베에의 탈취

사이토 류싱이 신국주가 된 미노국은 정정 불안이 됩니다.
에이로쿠 4년(1561), 미노국의 사이토가는 오와리국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공격받습니다. 이 전투는 사이토가의 승리가 되었지만 사이토가는 중신을 잃었습니다. 또 에이로쿠 5년(1562)에는 유력 가신이었던 군상 하치만성의 성주였던 엔도 모리수가 병몰합니다.

되감기를 하고 싶은 사이토 류싱은 어머니의 친가이기도 한 키타오미의 아사이가와 동맹을 맺으려고 했습니다만, 오다가에 앞서 오다가, 아사이가가 동맹 관계가 됩니다. 거기서 용흥은 옛부터 사이토가와 연결되어 있는 남오미의 육각가와 손을 잡고,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에이로쿠 6년(1563)에도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국을 침략합니다. 이 전투(신카노의 전투)는 다케나카 시게하루(다케나카 반베에)가 활약해 사이토가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에이로쿠 7년(1564). 사이토 류싱을 지지하는 사이토 히다모리에 사원이 있던 다케나카 시게하루는 주로 니시미노 3인중의 1명, 안도 모리나리와 함께 히다모리를 백낮 살해. 사이토 류싱은 거성이었던 이나바야마성을 빼앗겨 우가야마성, 유우야마성으로 도주했습니다. 이 도망생활은 반년에 걸친다. 이나바야마성을 빼앗기고 나서 반년 후, 용흥은 다케나카 시게하루, 안도 모리나리로부터 성을 반환되었다고 해도, 용흥을 지원하는 세력의 조력을 얻어 사이토 류싱이 빼앗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미노국 사이토가의 낙일은 누구의 눈에도 밝혀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

오다 노부나가는 병으로 죽은 사이토 요시 류의 무렵부터 미노국 침공을 본격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초는 싸움에 의한 힘을 밀고 있었지만, 그것과 병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고마키야마성의 축성을 실시합니다. 더욱 히가시 미노에 있는 이와무라성(현재의 기후현 에나시에 있던 성) 성주였던 토야마씨는 오다가와 인연이기도 한 것으로부터 오다가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엔도가를 중심으로 히가시 미노의 이치바시 씨, 마루모 씨, 다카기 씨 등의 국인중을 되찾아 히가시 미노를 잡습니다.
미노국 중 히가시미노는 오다가에 떨어졌습니다.

에이로쿠 8년(1565)에는, 오다가에 내린 카지다성(현재의 기후현 카모군 부카마치에 있던 성)의 성주, 사토 타다노가 사이토가 측의 국인중이었던 기시신슈 를 토벌합니다. 이 싸움에서는 용흥의 숙부였던 나가이 도리도 오다가의 무장이었던 사이토 리지(사이토 미조의 막내)에 패해, 나카노 지방도 오다가의 세력하에 들어갑니다.

미노 나라 중 나카노 지방도 오다가에 떨어졌습니다. 미노의 대부분을 오다가에게 빼앗긴 사이토 류싱은 교토의 아시카가 장군가에 가까워 되감기를 도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에이로쿠 10년(1567), 미노국의 유력국인중이던 니시미노 3인중(이나바 료도리, 씨가 나오모토, 안도 모리나리)이 오다가에 내응한 것으로부터, 사이토 류싱은 이나바 산성을 도망쳤습니다. 14세에 미노국의 국수가 되고, 20세에 미노국을 뒤로 한 용흥. 하지만 용흥이 다시 이나바야마성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여기에 마츠나미 쇼고로에서 시작되어 사이토 미조, 요시류, 용흥과 이어진 미치 산류 사이토 가문의 시모카미는 종말했습니다. 그러나 사이토 류싱은 복권을 도모하기 위해 각지를 방랑합니다.

이세 나가시마로 도망

에이로쿠 10년(1567년) 8월 15일, 사이토 류싱은 가신들과 이나바야마성을 탈출하면 성하의 키소가와를 배로 내려 미노국을 뒤로 합니다. 용흥이 향한 곳은 이세 쿠니카와치 나가시마였습니다. 그 용흥을 잡기 위해 오다군도 키타이세에 침공합니다.

사이토 류싱의 기사에는 계속이 있습니다.

관련 사건
하즈키 토모요
작성자(라이터)학생 시절부터 역사와 지리를 좋아해, 사적이나 사찰 불각 순회를 즐기고, 고문서 등을 조사해 왔습니다. 특히 일본사에서는 중세, 세계사에서는 유럽사에 강하고, 1차 자료 등의 자료는 물론, 엔터테인먼트 역사 소설까지 폭넓게 읽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무장이나 성은 너무 많아 좀처럼 들 수 없습니다만, 특히 마츠나가 히사히데·아케치 미츠히데, 성이면 히코네성·후시미성을 좋아한다. 무장의 삶과 성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일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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